“소프트웨어 업계에 우수한 인력이 더 이상 모이지 않는다.” “개발자는 3D 업종 종사자일 뿐.”
국내 소프트웨어(SW) 업계에 회자되는 우려들이다. 해외 대형 SW기업은 거듭된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불려가며 공세의 파고를 높이는데 우리 SW기업은 출혈 경쟁과 열악한 개발 환경에 허덕이며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왜곡된 시장 구조다. 발주처,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대형 IT 서비스 업체 등 ‘갑’의 가격 인하 압박 앞에 ‘을’ ‘병’에 해당하는 SW기업은 아무 소리 못 한다. 때로는 일단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자진해서 가격을 대폭 내려서 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로 도입된 것이 ‘SW 분리발주’ 제도다. 10억원 이상 공공기관 정보화 사업 중 5000만원 이상인 SW는 가격 관리 압박이 강할 수밖에 없는 IT 서비스 업체의 일괄 발주체계에서 분리해 발주하는 제도다. 우수 SW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길을 연다는 취지다. 행정 부담과 유지 보수 어려움 등을 극복하고 공공 부분을 넘어 민간까지 바람직한 시장 구조를 형성하기 위해 작년 5월 실시된 분리발주 제도가 안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높은 잠재력, 우울한 현실=SW는 제품과 서비스를 지능화·고도화하는 핵심 요소며 고용 창출 효과도 큰 고부가 산업이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SW의 부가가치율은 28.7%로 자동차(20.6%)·컴퓨터(11.5%)보다 높고 매출 10억원당 고용 창출 능력도 제조업의 8배인 6.4명에 이른다. 국내 SW 생산과 수출은 지난 5년간 각각 연평균 5.6%, 27% 성장해 왔으나 아직 SW 생산액은 국내총생산(GDP)의 1.2%, IT 생산액 중 9.1%에 불과하다.
그만큼 성장의 여력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내 SW 기업은 전체의 97.7%가 매출 300억원 미만일 정도로 대부분 영세한 중소기업들이고 대형 프로젝트를 휩쓰는 대기업 계열 IT 서비스 기업에 치여 참여가 제한되는 상황이다. 중소 SW 기업은 대기업이 수주한 사업에 하도급으로 참여하나 대기업이 제시하는 낮은 가격과 대금 지급 지연 등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다.
◇정부 분리발주 앞장=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SW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에서 들고 나온 것이 분리발주 제도다. 공공 시장이 전체 SW 시장의 20%를 넘는 상황에서 SW 시장 개선에는 정부 역할도 일정 부분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실 공공 SW사업자를 선정할 때 가격의 비중이 너무 커 우수 기술의 중소기업도 참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SW사업은 예정가격을 정할 때 법정 최저 수준인 10%의 이윤율이 적용된다. 민간 분야도 공공 분야의 기준을 준용하다 보니 SW로 제값 받기가 더 어려워진다.
정부는 ‘SW분리발주 가이드라인’을 이용해 분리발주 대상 SW를 일괄 발주하고자 할 때에는 현저한 비용절감이나 SW사업의 품질 제고 등 합리적 사유를 사업계획서에 명시하도록 하는 등 분리발주를 권장하고 있다. 또 중소SW기업 활성화 대책으로써 분리발주 SW에 선금을 지급하고 선금 지급 범위에 커스터마이징이 있는 SW도 포함시켰다. SW기업인도 “분리발주로 SW기업은 종속적인 하도급 업체에서 독립적인 개발사로 변화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자율아닌 강제화 필요=그러나 분리발주는 아직 초기 단계로 실제 시행 결과가 미미하다. 무엇보다 강제력이 떨어지는 가이드라인 형태다. SW 분리발주 정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당사자는 발주자지만 분리발주 자체가 이들의 자율에 맡겨져 있다. 가이드라인을 제도화해 법률이나 고시 형태로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 SW 제품군으로 분류된 분리발주 가능 SW를 세분화, 우수성이 검증된 SW들을 발주자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분리발주에 관한 홍보와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과제로 꼽힌다.
SW 업체들도 분리발주에 대비, 출혈 저가 경쟁이나 트렌드 제품 개발에 몰려드는 것보다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는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 또 우수 인력이 분석·설계 업무를 전담할 수 있도록 단순 개발 업무에서 설계-개발 프로세스를 분리해 발주하는 분할발주로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세희기자@전자신문, hahn@
‘제 값을 받고 있습니다.’
SW분리발주가 시행되면서 실제로 분리발주를 수주한 SW기업들의 공통적인 말이다.
지난해 12월 행정자치부에서 발주한 국가기록 통합검색체계 구축 및 연계 확대 사업 가운데 온톨로지 구현 구축사업을 수주한 신정훈 씨엔시스템 대표는 “주사업자를 통한 일괄 발주에 비해 10∼20% 공급 가격이 높아진 것”으로 평가하며 “IT서비스기업 눈치 볼 필요 없이 고객과 직접 계약하고 솔루션을 공급함으로써 서비스 품질도 더욱 높일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정보통신부 제2정부통합전산센터 2단계 전산기반 환경 구축 사업 가운데 서버보안시스템을 분리 수주한 시큐브도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 김진 시큐브 이사는 “일괄발주 시에는 기술과 가격이 8 대 2였으나 분리발주 시에는 기술점수가 9로 높아지면서 기술력이 높은 기업에 더욱 유리하다”며 “가격적인 측면에서도 최대 2배 정도가 차이가 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결국 SW분리발주는 제 가격 받기뿐만 아니라 기술력이 높은 기업을 우대함으로써 산업적으로도 자생력을 갖춘 기업을 키우는 효과를 내게 되는 셈이다. 또 SW기업의 중요한 수익원천인 유지보수 매출에도 기여한다. 유지보수 계약은 공급 가격의 몇 %로 하는데 제 값을 주고 공급한 제품은 유지보수 금액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SW기업들은 분리발주된 SW는 유지보수 계약도 해당기업과 직접 하는 방식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현재 유지보수 계약은 발주처가 주사업자와 유지보수 계약을 하고 주사업자가 다시 솔루션 기업들과 체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아웃소싱과 다단계를 거치면서 실제로 유지보수료가 줄어드는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SW분리발주를 시행한 사례는 10여건 정도. 의지는 있지만 행정적인 어려움과 업무 가중 등으로 아직까지 제대로 SW분리발주가 진행되지는 않고 있으나 올해부터는 본격화될 전망이다. 행정자치부·국방부 등에서 올해부터 SW분리발주를 전면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사실 윗선에서는 분리발주 의욕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실무진의 처지로서는 번거롭고 위험성이 많은 분리발주를 꺼릴 수밖에 없다”며 “SW분리발주를 이른 시간 내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이를 유도할 만한 인센티브 등이 도입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형준기자@전자신문, hj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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