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기준 올해 개봉한 영화는 총 86편이다. 극장을 잡지 못하고 DVD시장으로 직행한 작품까지 합치면 총 100여편이 한국 관객을 만났다. 여느 때와 차이 없는 흐름이지만 작품성으로 볼 때 흉작에 가깝다. 추격자 등 몇몇 작품이 있었지만 이들도 오랜 감동을 주긴 내공이 약하다는 평가다. 하지만 아오야마 신지의 신작 ‘새드 배케이션(아사노 타다노부,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조 출연)’을 보기 전까지만이다. 세상 모든 불행을 짊어진 남자의 인생을 그린 ‘새드 배케이션(sad vacation)’은 지난 2007년 부산 국제영화제 전회 매진 기록을 세운 수작이다. 이 영화는 예쁘게 포장된 말이나 위선적인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 대신 날카로운 시선과 북규슈의 광활한 대지를 이용,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슬픈 휴가로 시작된 가족사=젊은이의 출구 없는 삶은 아오야마의 전매 특허다. ‘헬프리스’와 ‘유레카’에서 보여줬던 젊은 영혼에 대한 통찰이 이 영화 곳곳에 녹아 있다. 특히, 1995년에 만들어진 그의 데뷔작 헬프리스와도 닮았다. 역시 자신의 고향인 북규슈를 배경으로 했고 켄지, 야스오 등 주인공의 이름도 같다.
새드 배케이션은 운명이 버린 가족을 그린다. 중국 밀항자를 일본인에게 넘겨주는 일을 하고 있는 켄지는 아버지를 잃은 소년 아춘을 집으로 데려온다. 5살 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10년 전 살인사건에 휘말린 친구 야스오의 여동생 유리와 함께 살고 있다. 대리 운전을 하던 어느날 우연히 찾아간 운수회사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한다. 불우한 현실이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한 켄지는 그녀의 행복을 뺏으려 한다. 하지만 일은 쉽지 않다. 새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는 운수회사는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빚쟁이, 불법 체류자 등이 모여 있는 일터. 이곳에서 함께 살게 된 켄지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혼란을 겪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대하는 어머니도 그렇고 가족처럼 서로 돕는 동료도 낯설다. 슬픈 휴가를 위해 찾아온 곳이 하필이면 모든 슬픔을 정화하는 호수라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낙관주의=한 인터뷰에서 아오야마는 가족 영화의 대명사인 오즈 야스지로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밝혔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우리는 야스지로와 소통하는 아오야마를 목도(目睹)할 수 있다. 야스지로가 그린 낙관적 가족주의를 고스란히 답습한 것이다.
켄지는 자신이 해야 하는 마지막 일이 어머니의 새로운 아들(자신의 동생)을 공동체(운수회사)에서 몰아내는 것이라고 느낀다. 동생은 자신의 행복을 빼앗아간 절대 악이다. 결국, 켄지는 동생을 사막 한가운데로 몰고 가고 그를 죽이게 된다. 일족을 죽인 켄지는 감옥에 가지만 남은 가족들은 슬픔보다는 죽음으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분주하다. 켄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심지어 새 아버지는 장례식에 찾아온 켄지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친구에게 새 가족이 되길 청한다. 부랑자들에게 아무 의심 없이 일거리를 줬듯 말이다. 이들은 계속 되뇐다. 살아 있어도 괜찮아. 살아 있어도 괜찮아. 그렇다. 아들은 갔지만 태어날 아기와 새로운 가족은 모든 것을 계속되게 만들 것이다. 아마도 폭력이 난무하는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위안을 삼는 건 이런 낙관주의 때문일 것이다.
한정훈기자@전자신문, exis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