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산업 패권을 놓고 나라별·권역별 ‘블록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반도체 불황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나온 생존 전략이지만 자본과 기술력을 좇아 움직이던 과거 반도체 업체의 합종연횡을 넘어 민족주의 양상까지 띠고 있다. 반면에 우리 반도체 업체 간 협력이 극히 저조한데다 하이닉스와 대만업체의 협력을 둘러싼 갈등까지 빚어지면서 국내 반도체산업의 위기론에 대한 우려가 점차 증폭되고 있다.
일본과 대만과 같은 동북아 지역엔 나라별 블록화가 활발하다. 일본의 르네사스테크놀로지와 샤프는 양사의 LCD드라이버칩 사업조직을 통합, 신설한 합작회사를 다음달 1일 출범한다. 한국과 대만에 빼앗긴 반도체 왕국의 영예를 되찾겠다는 의지도 숨어 있다. 대만 파워칩·TSMC·뱅가드의 반도체 3사는 공동 팹 신설에 이어 신주과학공원에 21만1000㎡ 부지를 확보, 14조원을 들여 300㎜ 팹 5개 라인을 신설하기로 했다.
일본과 대만 업체들은 양국 업체 간 제휴에도 적극적이다. 자금이 풍부한 대만의 난야테크놀로지는 독일 키몬다와 제휴 청산을 조건으로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손잡기로 했다. 대만의 프로모스는 50나노미터(㎚) 기술도입을 조건으로, 기존 제휴업체인 우리나라 하이닉스반도체와 새 제휴대상인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를 놓고 저울질이 한창이다. 대만의 파워칩은 이미 일본 엘피다메모리와 제휴했다.
유럽연합(EU)에도 ‘반도체 글로벌 기업 대연합(one European super chip company)’ 구축론이 고개를 들었다. 조세프 보렐 전 ST마이크로 수석부사장은 최근 NXP(옛 필립스반도체)·ST마이크로·인피니언의 유럽 빅3 반도체업체가 R&D·반도체 설계·파운드리 등 모든 프로세스를 통합한 대연합을 이끌어내 달라는 청원서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는 경쟁이 치열한 메모리 분야는 세 회사가 따로 독립 사업을 유지하되 비메모리 분야를 한 회사처럼 운영해 몸집을 키울 것을 제안했다. R&D 및 제조비용을 절감한다면 세계 1·2위 기업인 인텔과 삼성전자에 대적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다. 보렐 부사장은 “유럽 반도체 3사 간 공동 R&D 프로젝트는 추진되고 있지만 경영을 통합하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 개입해야 할 문제”라며 현지 언론에 밝혔다.
유럽·대만·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펼친 연합전선에 맞춰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는 뒤늦게 기술 협력을 모색, 지난 1월 테라비트급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소자 원천기술을 공동 개발하기로 한 바 있다. 하지만 경쟁국에 비해 낮은 수준의 협력인데다 최근 하이닉스의 대만 프로모스에 대한 양산 기술 이전을 놓고 양사 간 갈등이 표출되면서 16년 만의 협력 분위기가 다시 식고 있다.
김정수 하이닉스반도체 상무는 “최근 일본이나 대만·유럽 기업들이 연합하는 것은 차세대 기술이나 핵심 원천 기술 확보에 있는 것으로 안다”며 “우리나라 업체들도 국내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업체 등과 협력해 이후 제품과 기술을 어떻게 도입하고 확보해야 할지 기술로드맵을 세워 내부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국→일본→한국으로 이동해 온 반도체 시장 지배력 역사 순환이 주는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며 “지금은 향후 기술주도권이 중국·대만으로 넘어갈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문정·최정훈기자@전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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