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부가 간판을 내렸다. IT 사회에는 격랑이 일었고, 많은 IT인들은 심한 배멀미를 해야 했다.
김일수 회장(61)을 만난 것은 거친 소용돌이가 한차례 몰아친 직후였다. 김 회장은 테라텔레콤 회장이지만 정보통신공제조합 이사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정보통신분야의 원로다. 얼마전까지는 인수위원회 상임자문위원을 지냈다. 많은 정보통신인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도 컷다. 속앓이도 많이하고, 좌충우돌 뛰어다니기도 했다. 결국 물거품으로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는 주변의 염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라는 평가다.
기업인으로서의 그를 만나기 위해 서초동 교대역 부근에 위치한 정보통신공제조합으로 달려갔다. 이사장실에서 기다리기를 30여분,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던 그가 약속장소에 모습을 나타냈다. 건강을 가장 먼저 돌봐야할 환갑을 넘긴 노신사가 약속을 위해 외출 허가를 낸 것이다. 마치 그가 한평생을 어떻게 보내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 신용이 최고의 덕목
“항상 신용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 왔습니다.” ‘신뢰’에 대한 얘기로 그는 말문을 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지난 41년간 가슴 속 깊이 새겨온 덕목이라고 했다.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내다 보면 친화력이 생기고, 그것이 나중에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는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특히 시공업을 하다보니 특성상 거래처나 발주기관, 협력업체, 때로는 경쟁사들과도 협력을 해야 할 때가 있어요. 평소에 친분을 쌓아두면 다 도움이 되는 겁니다.”
실제로 그의 주변에는 유난히 사람이 많다. 그가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 사람들과 쌓아온 돈독한 신뢰가 밑거름이 됐다. 주변인물 가운데는 ‘협회 이사장까지 하시고 천천히 가시라’며 만류하는 인물도 있다. 그와 조금이라도 오래 같이하고픈 마음의 표현이었다.
◇ 평생 동지이자 멘토, 인간 장석하를 만나다
정치 얘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에 고민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 해 화제를 돌렸다. 젊었을 때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체신부에 입사할 당시부터 천천히 과거의 모습을 되짚어 들어갔다.
그의 인생 전환점은 군에서부터 시작됐다. 67년 체신부에 공채로 입사해 근무하던 그는 군생활을 해병대에서 했다. 그 곳에서 그는 평생 동지이자 멘토 역할을 해 준 장석하 회장을 만났다. 장 회장은 신흥정보통신 설립자이자 전임 정보통신공제조합 이사장을 지낸 인물로 그와는 뗄래야 뗄수 없는 지인이다.
후암동 해병대 사령부 통신분과. 장 회장은 당시 민간인 신분의 기술문관으로 그와 함께 근무했다. 함께 호흡을 맞춰 군 통신업무를 수행하면서 두사람을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장 회장은 인생 선배로서 그를 이끌어주기 시작했다.
그에게 사업가로 나설 것을 권유한 사람도 장 회장이었다. 제대 후 체신부에 복직한 그에게 장 회장이 연락을 취해왔다.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답답한 공직 생활에 지치기도 하고 ‘뭘하면 더 활동적으로 살 수 있을까?’하며 미래 비전을 고민하던 차였다. 군복무 시절부터 믿고 따르던 장 회장이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그는 장 회장과 15년을 함께 일했다. 82년에는 장 회장과 함께 신흥정보통신을 설립, 부사장직을 맡았다. 경영업무의 시작이었다. 2년여의 경영수업을 거친 그는 84년에 아주전자통신을 인수해 테라텔레콤 설립했다. 이 또한 ‘신흥정보통신은 충분히 키워놨으니 이제 독립을 해보라’는 장 회장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 서비스 마인드로 일군 기업, 테라텔레콤
물론 처음으로 맡은 CEO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했다. 체신부에 근무하면서부터 인연을 맺어온 분야이기는 하지만 테라텔레콤은 후발주자였다. 선발 기업들을 빠른 기간에 따라잡아야 한다는 부담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가 테라텔레콤을 반석위에 올려놓기 까지는 직원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서비스 마인드’를 외쳐야 했다.
“시공 사업은 서비스예요. 고객이 만족해야 성공하는 겁니다.”
이 같은 서비스 정신은 그의 경영철학이 됐다. 조금이라도 더 정성을 기울이라는 의미로 전직원의 유니폼에 명찰을 달도록 했다. 고객만족을 위해서는 품질과 타이밍을 생명처럼 지키도록 했다.
“그렇게 한해 두해 지내다 보니 지금은 주변에서 테라텔레콤을 ‘하이테크’ 기업이라고 인정하대요.”
테라텔레콤은 지난해 200명의 직원이 3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350억원의 매출 목표를 세웠다.
올해 사업계획에 대해 그는 “제조와 시공은 물론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정보통신 토털사업자로 성장시킬 계획”이라며 “홈네트워크와 해외시장 개척도 해야 하고 할일이 많다”고 답했다. 벌써 환갑을 넘겼음에도 사업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 남아있는 듯 했다.
◇ 끝없는 고민, 정보통신산업의 미래
“학력이요? 허허. 연세대 최고경영자 과정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보통신방송정책 과정을 수료했어요.”
그는 대학 졸업장 대신에 유선설비기사 자격증을 선택한 세대였다. 60년대만 하더라도 자격증과 대학 졸업장은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자격증만 있으면 대기업 임원으로도 갈 수 있었는걸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학연이니 지연이니 하며 따지기가 일쑤라 어려움도 많았을 법한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시 공직에 있으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졸업장이었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를 못느낀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는 지난 20여년간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인맥을 만들고, 신뢰를 쌓았다. 능력 하나만 가지고 자신이 설립한 기업을 튼실하게 키워냈다. 그 결과 지난 2006년에는 정보통신공제조합 이사장에 선출됐고, 정보통신분야 원로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상임자문위원직도 맡았다.
그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정보통신산업의 미래를 좀 더 밝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안그래도 사업하기가 날로 힘들어지는 상황인데 정통부가 해체됐어요. 믿고 의지해 온 바람막이가 사라졌으니 걱정이 되죠.”
어느덧 이야기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즈음 급하게 찾았다. 당장 처리해야 할 결재서류가 8개나 밀려 있다는 타전이었다. 회사를 돌보고, 조합을 이끌면서도 이런 저런 고민을 듬뿍 짊어진 그의 열정이 새삼 느껴졌다. 서둘러 인터뷰를 마치기로 했다.
◇ 한번 정보통신인은 영원한 정보통신인
지난해 12월 창립한 ‘글로벌 IT포럼’은 이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전문가들의 역량을 결집해 산업발전을 모색해 보자는 취지였다. 그는 전문가는 물론 국회의원까지 지인들을 총동원해 민관연을 망라한 포럼으로 띄웠다.
“우리가 IT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정부 조직개편 상황이나 글로벌화라는 당면 과제를 생각하면 미래를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통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첫 국제 행사를 연기해야 했어요.”
그는 지난달에 개최하려던 글로벌 IT 포럼 행사가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초대 회장을 맡았던 윤동윤 전 정통부 장관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을 맡았다. 조만간 글로벌 행사를 다시 준비해 성대하게 치를 생각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상임자문위원직을 수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였다. 하지만 인수위에 참여하고도 정통부 해체를 막지 못한 일은 평생을 두고 마음 한켠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이번 정부 조직개편은 신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성장통’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쉽게 덜어내지 못할 마음의 짐이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일을 준비중이다. 아예 정치에 나서볼 생각이다. 여기 저기 추천을 받아 한나라당에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했다.
“IT 산업의 비중이 예전만 못하잖아요. 40여년간 이쪽에서 밥을 먹고 산 사람이 힘을 보태야지요.”
집무실 문을 나서는 기자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며 그가 건넨 마지막 말이다.
◇ 김일수 회장은?
1948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들과 함께 상경, 서울에서 자랐다.
67년 체신부에 공채로 입사, 정보통신 산업에 입문했다. 73년에 공직에서 나와 일반기업에 몸을 담았고, 84년에 테라텔레콤을 설립해 본격적인 CEO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24년간 테라텔레콤을 국내에서는 손꼽히는 정보통신공사 시공업체로 발전시키며 조직운영 및 대외협력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2006년부터 정보통신공제조합 이사장직을 수행해 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글로벌 IT포럼’을 창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상임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김순기기자@전자신문, soonk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