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성사, 국내 최초로 흑백TV 생산
1966년 8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흑백TV가 세상에 나왔다. 진공관식 19인치 1호 제품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국내 최초 흑백TV ‘VD-191’은 진공관 12개와 다이오드 5개를 채택하고 4개의 다리가 달린 가정용 제품이었다. 1959년 국내 첫 라디오 생산에 이은 7년 만의 쾌거였다.
최초 TV의 생산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금성사는 1960년대 초에 입안한 ‘금성사 발전 5개년 계획’의 추가계획에 민수용 품목인 TV·전기시계·자동차용 전기 부속품 등을 포함시키면서 TV 생산 계획을 구체화했다. 지속적으로 생산기술과 시설을 도입, 1963년 초에는 온천동 공장에 TV 생산 시설을 갖추고 시운전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무렵 국내 외환위기가 시작됐다. 어려운 전력 사정 등을 이유로 TV 생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부품 수입 허가가 나지 않아 생산이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1965년 초 금성사는 ‘텔레비전의 국산화 계획 및 전기제품 수출 대책에 관련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 TV 국산화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반응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금성사는 1965년 7월 TV과를 신설하는 한편 9월 6일에는 일본 히타치제작소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준비를 갖춰 나갔다. 결국 정부는 1965년 말 조건부 TV 생산을 허용했다.
이후 금성사는 TV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1966년 2월 안상진 TV과장팀을 히타치제작소에 파견해 기술연수를 받게 하고 정부에는 원가 상승 요인인 특관세와 물품세 감면 조치를 건의했다. 부품 수입도 추진했다.
드디어 1966년 7월 TV 생산에 들어간 금성사는 8월 1일 국내 최초의 TV VD-191을 시장에 내놓았다. 처음 생산량은 500대, 가격은 8만6000원 정도였다.
고가품에 속했지만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외제만 나돌던 상황에서 우리 손으로 TV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 국민의 자부심과 호기심을 이끌어냈다. 급기야 공급이 달려 공개 추첨으로 판매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VD-191은 1968년까지 4만635대가 생산된 뒤 단종됐다.
흑백TV의 생산은 콘덴서·저항기·브라운관 등 300종이 넘는 전자부품 수요를 이끄는 전자산업의 총아였다. 이런 점에서 TV의 국내 생산은 영상매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전자부품산업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TV 생산 허용까지
정부는 1961년 12월 31일 국영 KBS TV가 개국하면서 5·16의 당위성과 경제개발계획 대국민 홍보 필요성을 절감하고 TV수상기 보급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1962년 초 문공부는 TV 2만대를 수입해 보급하는 한편, 금성사에 TV 국내 생산을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3년에 들어서면서 TV 생산에 향한 국내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게 됐다. 차관 중심의 외화가 유입됨으로써 외환위기를 불러왔고 전력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TV 생산에 필요한 부품 수입허가가 나지 않아 금성사는 TV 생산계획을 재고해야 했다. 이후 외환위기가 가라앉고 국민 소득 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정부는 제한된 범위에서 금성사의 TV 생산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제한된 범위란 국산화율 50% 이상일 것과 함께 TV용 부품 수입은 라디오 등 다른 전자제품을 수출해서 벌어들이는 외화만큼만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외화사정을 감안해서 수출외화-수입외화 링크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정부는 금성사에 이어 동남전기와 일본의 샤프 간, 한국마벨과 미국 RCA 간 기술제휴 및 흑백TV 생산을 승인했다. 이는 삼양전기·천우사·동신화학·대한전선·삼성산요 등이 잇따라 TV 생산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1960년대 선보인 국내 최초 제품들
1960년대는 국내 최초 전자제품이 잇달아 선보인 시기다. 1959년 국산1호 라디오 생산 이후 계속된 선풍기(1960년), 트랜지스터시계·자동전화기(1962년), 적산전력계·전기모터·전축(1963년), 냉장고(1965년) 등의 개발 경험은 TV 개발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금성사는 1960년 초 쇠파이프를 휘어 몸통을 만든 국산 1호 선풍기 ‘D-301’을 개발했으나 이듬해 단종시키고 각도조절과 상하작동이 가능한 선풍기 머리, 키보드식 버튼, 로터리식 타이머 등이 부착된 제품을 1963년 선보였다. 적산전력계는 서독 후어마이스터사의 시설 차관과 히타치제작소의 기술제휴로 선보여 1964년 한 해에만 18만개를 생산했다.
1965년에 개발된 냉장고는 금성사로서는 TV 다음으로 중요시했던 품목이었다. 모기업 락희화학에서 사용되는 치약원료용 냉동실 제작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냉장고 구조와 전기회로는 미군 PX에서 불법 유출된 빙과점용 냉동기를 역분석해서 알아낸 것이었다. 금성사 구정회 사장 소유의 미제 RCA 냉장고를 완전 분해해 연구자료로 활용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이렇게 해서 국산 1호 냉장고 ‘GR-120’이 탄생할 수 있었다. 120리터짜리 이 모델은 RCA·웨스팅하우스 등 외산 제품이 득세하던 국내에서 8만6000원에 시판돼 6000대가 팔리는 큰 성공을 거뒀다.
금성사는 다른 가전제품에 비해 비교적 늦게 세탁기 개발에 착수, 1969년 5월에 국내 최초 세탁기 ‘WP-181’을 생산했다. 이 제품은 알루미늄으로 제작, 세탁과 탈수 용량은 1.8㎏, 4단 수위 선택 스위치와 스프링식 타이머 등이 부착됐다.
WP-181은 처음 1500대를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수요를 감안해 500대를 우선 생산하기로 하고 1차로 195대를 생산했다. 그러나 고형 비누를 사용하는 데 익숙한 소비자 생활 습관과 세탁기를 사치품으로 여기는 시대 분위기 때문에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생산을 일시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비자 생활 패턴을 크게 변화시킬 대표적 가전제품이었지만 초기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1971년에 다시 용량 2㎏짜리 모델 ‘WP-2005’를 개발, 그 해 49대를 생산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생산량과 성능을 높여갔다. 1972년 10월 2일에는 일본 히타치제작소와 전기세탁기 생산을 위한 기술 제휴를 하고 1973년 5000대를 생산한 후 1975년 이후에는 매년 2만대씩 증산할 계획을 추진했다. 소비자 인식도 점차 바뀌었다. 금성사는 1974년에 생산량 2만대를 넘어서며 본격적으로 세탁기 시장을 창출해 나갔다. 1976년에는 수출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