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요청서(RFP)의 3분의 2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수주했습니다. 이렇게 2∼3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문 닫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최근 70억원대 규모로 RFP가 나온 금융솔루션 프로젝트의 경쟁에서 밀린 모 SW업체 임원의 말이다. 이 회사조차도 RFP에 비해 낮게 가격을 산정했음에도 경쟁사가 워낙 단가를 낮춰 어쩔 수 없이 경쟁에서 밀렸다는 설명이다. ‘저가 출혈 경쟁’으로 대변되는 한국 SW산업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 같은 상황은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올 초 한국GS인증협회(회장 백종진)가 굿소프트웨어(GS)인증기업 478개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조사대상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3%가 ‘저가 출혈 시장 경쟁 구조’ 때문에 SW사업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변했다. ‘전문인력 부족(20.4%)’ ‘경영·기술개발 자금난(14.1%)’ ‘SW는 공짜라는 인식(11.4%)’보다 훨씬 높은 응답이다. SW업계도 현재의 시장 구도에 대한 우려가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동시에 업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개선 가능성도 볼 수 있다.
최근 한국 SW산업은 매우 발전적인 모습이다. 2002년 5610개사에 이르렀던 SW기업 수가 2003·2004년 각각 4940개사·4877개사로 감소세를 보이다가 2005년(5304개사)과 2006년(7067개사) 비교적 큰 폭의 증가세를 나타냈다.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SW산업 육성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정부 차원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고 이것이 새로운 SW업체 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결코 달갑지가 않다. 출혈 경쟁 만연으로 새로운 업체의 등장은 곧 더 심한 출혈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단순히 기업 수가 늘어나는 것은 과잉경쟁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과거와 같은 연쇄부도 상황을 다시 만들지 말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업계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우선 프로젝트 컨설팅 단계부터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컨설팅을 대규모 구축사업의 선행투자 정도로 볼 것이 아니라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적정한 프로젝트 단가 산정으로 이어지고, 저가 출혈 경쟁을 막을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컨설팅업체가 본사업에 참여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이미 해외에서는 보편화돼 있는 것으로 컨설팅과 본사업의 주관업체를 분리함으로써 부실 컨설팅을 막고 동시에 본사업을 위한 컨설팅을 차단해야 한다.
신익호 한국SW진흥원 전략기획팀장은 “컨설팅은 어떤 SW를 써야 하는지를 명확히 정의하고 정립해야 하며 이것만이 컨설팅을 받는 업체가 가장 적정한 SW업체를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 팀장은 아울러 “컨설팅 단계에서 경험이 많은 고참 인력들을 투입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이는 고급 컨설턴트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막고 있다”는 문제점도 지적했다.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도록 업계 스스로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나온다. 3만개 중소기업 IT화 사업 등 정부 주도사업의 중단에 따른 폐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업계는 새로운 분야를 계속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정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과당경쟁은 비효율성을 내포하는 것”이라며 “해외시장을 개척하거나 국내시장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산업을 형성해 나가듯이 업계도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국내업체 간 인수합병(M&A)을 통한 대형화도 필요하다. 지난해 IDC가 발표한 국가별 100대 패키지SW기업 현황 자료에 따르면 미국이 82개사며, 독일·일본(각 4개사), 영국(3개사), 프랑스·캐나다(2개사), 이스라엘·네덜란드·스웨덴(각 1개사) 등도 국명을 올렸으나 한국업체는 한곳도 없었다. 우리나라가 IT강국이면서도 SW는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을 듣는 이유다.
다행히 M&A는 서서히 확산 추세다. 더욱 거대해진 다국적 SW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M&A가 필수라는 인식이 퍼진 결과다. 김형곤 투비소프트 사장은 “독자 생존을 고집했던 예전과 달리 최근 SW업체 오너도 M&A 필요성에 동감하고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는 태도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황준호 대우증권 연구원도 “SW업계에서는 M&A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전망했다.
◆기고-SW산업의 질적 발전을 위한 올바른 시장구조
: 유병창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
국내 SW산업은 10년 전과 비교해 규모 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외형적 성장에 주력하다 보니 불합리한 시장구조, SW업체 간 과도한 출혈경쟁 등 산업 내적인 문제가 하나둘씩 발생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는 산업의 내실화 정책도 병행해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양적, 질적 성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특히 국내 SW산업계가 질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최저가 입찰과 업체 간 과도한 출혈경쟁이 만연한 시장구조를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우수한 품질의 SW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가 어렵고, 이 때문에 곧 견실한 기업마저도 생존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혼탁한 시장을 건전한 생태계로 만들기 위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국내 SW사업자 수의 거품을 빼는 것이다. 가까운 일본과 비교해 국내 SW시장규모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비해 약 7배 수준인데 비해 사업자 수는 겨우 1.3배다. 즉, 기업당 평균 매출액 규모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의 6배를 웃도는 셈이다.
반면에 국내 SW기업들은 매출액이 1억원 미만인 사업자가 전체의 52%를 상회하고 있어 SW산업계 전반이 하향평준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시장은 작고 경쟁자는 많은 현실 속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도한 출혈경쟁이 불가피하며 결국 저가수주 등의 폐해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SW기업이 사업수행 능력이 있는지, 보유한 핵심기술이 무엇인지 등을 평가, 공개해 최소한의 자격요건을 구비한 SW사업자를 위한 사업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아울러 출혈경쟁을 유발하는 발주관행도 개선이 필요하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SW분리발주는 철저하게 지키되 SW업체 선정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기술점수와 가격점수로 이루어지는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가격점수 비중을 줄이고 기술점수를 더욱 높여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도 가격이 아닌 기술로 승부를 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최저가 낙찰 기준을 하향 조정한 것은 다소 우려된다. SW업계의 최대 고객으로 꼽히는 공공 시장에서 최저가 입찰이 일반화되면 업체들의 가격경쟁이 심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앞서 올바른 시장구조 형성을 위한 몇 가지 개선사항을 언급했지만 이는 SW업계의 자정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SW기업들도 제살 깎아먹기 식의 무리한 저가 경쟁에 집착하지 말고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는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 아무쪼록 올바른 SW시장구조를 통해 우수한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국내 SW산업의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유병창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 bcyoo50@posdat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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