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 이전 일반인에게 ‘전자’라는 말은 생소했다. 정부와 산업계 역시 ‘전기공업’ 또는 ‘전기기계공업’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정부는 비로소 국가 차원에서 전자공업 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후반 정부의 전자공업 육성 의지는 상공부의 산업육성책으로 표출됐다. 상공부는 1964년 전기공업과를 신설한 후 1966년 초 전기공업과의 통신공업계 업무 부문을 통신과 가전으로 나눈 다음 가전 분야를 전자공업계로 승격시켰다. 작으나마 상공부의 이 같은 직제 개편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정부정책 중심으로 진입하는 한편 관련 업무가 행정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66년 전기공업과는 전자산업을 특화산업으로 지정해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이에 대비해 산업육성 기반구축 작업에 돌입했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개발품목 발굴 및 조사 △전자공업 영역확대 △외국산 수입제한조치 △전자공업협동조합 창립 추진 △전자공업진흥 5개년 계획 수립 등 5개항을 담은 계획을 마련했다.
이 계획에 따라 상공부는 1966년 12월 15일 박충훈 장관을 통해 ‘전자제품 수출 8개년 계획’의 근간이 되는 ‘전자공업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주요 골자는 전자부품의 국산대체, 조립 및 부품공장의 분업화와 전문화, 수출원가의 절감, 기술인력의 양성, 수출시장 다변화 등이었다.
한국의 전자산업을 결산하는 최대의 수확은 역시 1969년 1월 시행된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의 제정의 취지는 전자산업을 국가 중추산업으로 진흥함으로써 산업설비 및 기술의 근대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케 한다는 것이었다. 1959년 금성사의 진공관라디오 개발이 있은 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 법이 제정됨에 따라 정부는 비로소 본격적인 전자산업진흥시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그 가운데서도 상공부는 중점 육성대상 품목을 지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전자산업 육성 주무부처로서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상공부 장관에게는 중점 육성이 필요한 전자기기 품목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과 이 권한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전자공업진흥기본계획 수립 임무가 주어졌다. 이때 장관이 지정할 수 있는 중점 육성대상 품목은 관련기술의 국산화, 업계의 전문화와 양산화, 성능과 품질의 개선 등이 요구되던 것들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민간업계에 상공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근거기도 했다.
장관은 또 성능과 품질보장이 필요한 기기의 품질검사를 실시하며 기술개발과 해외시장 개척 등에 필요한 시책을 강구할 것도 규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수출 촉진을 위한 전자공업단지의 조성과 필요할 경우 관련기관과 단체로부터 보고를 명할 수 있는 권한도 가졌다. 장관의 자문에 응해주는 15인 이내의 ‘전자공업심의회’를 설치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공포와 동시에 정부는 이 법에 의거해서 수립한 중장기 진흥기본계획인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당초 5개년 계획이었으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과 일치시키기 위해 8개년으로 조정됐다.
핵심은 8년의 계획기간 동안 총 140억원의 진흥자금을 투자하여 마감 연도인 1976년에 전자산업부문 수출액이 4억달러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서 전자산업진흥의 3대 목표는 중점육성 대상 품목의 개발(국산화), 수출목표의 달성, 국산화의 단계적 제고 등으로 정해졌다. 구체적 진흥방안으로는 기기·부품·재료 간 제조 계열화를 통한 산업개발 체제의 확립, 수출 전략산업으로서의 육성, 진흥기금 조성 등이 제시됐다.
상공부는 이 계획에 따라 우선 전자기기 54개, 전자부품 29개, 전자재료 12개 등 모두 95개 품목을 진흥대상으로 지정하고 1969년부터 1971년까지 1단계, 1972년부터 1976년까지 2단계로 나눠 육성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결국 이 계획은 대성공을 거뒀다. 1976년 전자산업 수출액은 목표했던 4억달러가 아니라 10억3600만달러를 수출했으니 무려 260%의 달성률을 기록한 것이다. 이 해 우리나라의 총수출액은 77억1500만달러였으니 전자제품이 점하는 비율은 17.6%에 달했다.
한편 전자공업진흥법은 이 시기에 비슷한 취지로 만들어져 시행됐던 기계·철강·조선·화학·섬유·에너지 등 다른 6개 분야 진흥법과 함께 1986년 7월 ‘공업발전법’으로 흡수 통합됐으며 1999년 2월 공업발전법이 폐지되고 새로이 ‘산업발전법’이 제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자공업진흥 주도‘FIC’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주도한 진흥기관은 한국정밀기기센터(FIC)·국립공업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등이었다.
세 개 기관 가운데 8개년 계획을 사실상 주도한 곳은 FIC였다. 1966년 발족된 FIC는 전자산업정책 수립을 위한 통계, 관련업체 등록, 기술인력 및 기능공의 양성, 해외시장 개척 등의 업무를 맡았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미국보험협회안전규격(UL)을 비롯,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 독일전기기술자협회(VDE), 캐나다표준협회(CSA) 등 유명 해외 표준규격 인증 업무도 대행했다. 1969년에는 대외 이벤트로서 한국전자전람회(KES)와 전국라디오조립경연대회 등 전국 규모 행사를 창설하기도 했다.
매년 10월 개최되는 KES는 역대 대통령이 직접 개막 테이프 커팅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전자산업에 대한 국정 최고책임자의 의지와 관심을 표명하는 행사로서 자리 매김했고 현재까지도 국내 최대 규모 종합전자전시회로서의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FIC 활동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역시 해외시장 개척 부문이었다. FIC는 전자공업진흥기관으로 지정된 직후인 1969년 7월과 1970년 7월 잇따라 뉴욕과 도쿄에 해외사무소를 설치하고 해외시장조사 및 수출진흥 활동에 나섰다. 당시 해외 FIC사무소에서 수행했던 주요 업무는 기술정보 및 시장조사, 자본 및 기술의 도입과 유치, 수출진흥 및 홍보 등이었다. 뉴욕과 도쿄사무소의 활동이 성과를 거두자, 1971년 거점을 샌프란시스코와 본 등으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FIC는 1979년 업체등록과 산업진흥 관련조직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와, 연구개발 조직은 금속시험연구소와 통합해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로 재출범했다.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는 다시 1980년 선박연구소와 통합, 한국기계연구소(현 한국기계연구원)로 거듭났다.
국립공업연구소는 국내에서 유일했던 공산품 품질관리기구로 진흥대상 업체들의 전자기술 개발과 품질검사 및 지도를 맡았다.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 2단계를 1년 앞둔 1971년 당시로서는 거금인 25만달러를 들여 전자기기 품질검사용 장비를 도입했고 이듬해에도 10만달러 상당의 장비를 추가 구입함으로써 국립 품질검사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췄다. 이 연구소는 1973년 신설된 공업진흥청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명칭도 국립공업표준시험소로 변경됐다. 이후에도 몇 번의 명칭 변경으로 현재의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으로 정착이 됐다.
KIST는 진흥대상 업체들의 기술 개발을 지도하고 FIC 업무 범위를 벗어나는 특수 분야의 품질관리, 기술훈련, 기술정보 제공 등을 담당했다. KIST는 1969년 11월 진흥기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공업화시험실 등을 신설하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미국전기전자학회(IEEE)와 공동으로 ‘국제전기전자학술대회’를 주최, 안팎으로 큰 관심을 불러모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