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의 시작이 빠른 편이다. 덕분에 한적한 분위기에서 차분하게 앉아 나를 돌아보는 글을 쓸 수 있다. 초등학생 시절 억지로 썼던 일기와는 다르다.
기록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과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일본인을 비교한 글을 신문에서 보고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시작한 글쓰기가 19년째 이어졌다. 그 묵상 일기노트가 30여권에 이른다. 나의 책장 제일 윗칸에 보관돼 있고, 그것이 나의 소중한 물건이 됐다.
일기 형식으로 쓰여진 나의 생활에 관한 기록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보는 것이 즐거움 중 하나다. 작년, 재작년 멀게는 15년 전 이맘때쯤 무엇을 했을까. 묵상 기록을 보면 선명하게 그때의 일이 그려진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일이지만, 나에게 또 나의 가족에게 의미 있었던 일들이 되살아난다.
옛날 기록을 통해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습관이 꼭 생산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할 일이 적지 않은데 무슨 청승으로 옛날의 추억을 즐기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느냐, 아직 그런 나이가 아니지 않느냐 자문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일을 더듬는 것은 나의 생활에 긍정적인 자극을 가져온다.
1년 전 일기를 보면 2년 전에 있었던 잘못된 일을 되돌아보면서 이제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하는 다짐이 있지만, 지금도 똑같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러면 또 다짐한다. 언젠가 다시 일기를 볼 때, 지금과 같은 후회가 생기지 않도록 나를 추스르는 일이다.
묵상 일기를 처음 시작한 날은 1990년 1월 어느 날, 3당 합당이라는 정치적인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그때 적어 놓았던 나의 느낌을 보면서 당시 정치환경을 되새기는 재미도 있다. 언젠가는 여러 가지 주제 각각에 대해 시간대별로 사건과 나의 느낌을 엮어 놓으면 그 또한 새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주제별로 잘 엮어지면 각각의 기록물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욕심도 있다. 훗날 새로이 엮인 나의 기록을 보고 아이들이나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질문이 나의 현재의 생활을 절제하는 효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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