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CEO]백종진 한컴사장 "벤처신화는 진화한다"

 백종진(48) 사장을 만났다. 아니 백종진 회장을 만났다. 백 사장이 IT에 처음 입문할 때 대면한 이후 10년 만이다.

 그의 도전적 눈빛은 이제 원숙함이 가미됐다. 그리고 그의 입은 ‘벤처기업’ 대신 ‘한국벤처’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 변화를 주도한 것은 무엇일까. ‘세월’인지 ‘자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관심이 벤처기업 CEO의 관점보다 벤처산업협회장의 관점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날 만남에서 그가 던진 메시지는 하나로 압축된다. 바로 ‘변대규 휴맥스 사장 같은 재목이 계속 이어져 우리나라에도 존경받는 벤처인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벤처의 발전적 생태계 조성이 시급하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속내도 털어놨다. “전 벤처기업을 창업한 적이 없는 벤처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술기반으로 창업한 전문 벤처인들과는 출발선상이 다른 셈이지요.”

 그는 창업벤처인과 벤처경영인, 즉 벤처 CEO들의 대표단체인 벤처산업협회장직을 맡아, 한국벤처산업의 미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는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 위촉된 최연소 위원으로 벤처 현장의 목소리를 대통령에게 핫라인으로 전달하고 있다. 또 이명박 대통령 해외순방길에도 벤처기업인을 대표해 동행이 예정돼 있다.

 “사실 어깨가 무겁습니다. 하지만 1만4000여개 벤처를 대표해야 하는 자리인만큼, 청와대에도 벤처인에게도 실망을 안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운명 같은 벤처와의 만남

 백 사장은 무역회사 직원 명함을 들고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창업한 것도 ‘미디아상사’라는 무역회사였다. 이 회사는 100만달러 수출탑을 수상하며 잘나갔다.

 “1999년이었습니다. 한 벤처기업의 PC 하드웨어 보안제품 수출을 맡게 됐는데, 그 회사 사장이 수출독점권을 주는 대신 1억원을 투자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요. 단순 투자에 불과했지만, 이때가 벤처와의 첫만남인 셈입니다. 그런데 1억원이 2∼3주 후에 3억원이 돼서 돌아왔습니다.”

 백 사장은 이때 ‘에인절투자’에 관심을 갖게 됐고 스스로 투자회사도 만들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벤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 것은 프라임벤처캐피탈 사장을 맡으면서다. 당시 그의 큰형님인 백종현 프라임그룹 회장이 ‘너는 외국어도 능통하고 특히 승부사 기질이 있어 벤처캐피털에 적격’이라며 적극 밀었다. 이때 백 사장은 다양한 벤처기업에 투자하며, IT벤처경영인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다. 

 #벤처 투자가에서 IT 벤처기업인의 길로

 2003년 2월 프라임그룹은 백 사장의 제안에 따라, 수차례의 정밀한 검토과정을 거쳐 ‘아래아한’과 한글과컴퓨터를 한 식구로 맞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를 주도한 백 사장은 2003년 한글과컴퓨터 사장을 맡으며 IT벤처인의 길을 걷게 된다.

 “되돌아보면 그때만큼 힘들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외롭고 괴로웠는데, 큰형님이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셨지요.”

 당시 프라임그룹 임원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IT분야 진출의 필요성을 인식한 백종현 회장이 백 사장의 의지에 확신을 심어줬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우선 외적으로는 소프트웨어를 모르는 백종진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전문가들도 포기한 회사를 살릴 수 있겠느냐는 불신이 만만치 않았다. 또 오랜 기간 주인 없는 회사로 방치되면서 직원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여기에 경영권 분쟁까지 겹치자 회사 내부의 사기는 그야말로 바닥이었다.

 지금은 일소됐지만 일각에서는 프라임의 한글과컴퓨터 인수를 일시적으로 회사가치를 키워 팔아먹는, 이른바 ‘먹튀(먹고 튀기)’라고 헐뜯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벤처기업들의 흥망성쇠를 투자와 자문을 통해 지켜본 나로서는 이대로 가면 한글과컴퓨터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가져다준 ‘부활’ 그리고 제2의 도전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한글과컴퓨터에는 ‘부활’이란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한글과컴퓨터는 백 사장 취임 후 단 8개월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주변에서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원동력은 경영자와 직원 간의 믿음에 있었다.

 “저는 임직원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믿지 않을 거면 같이 하지를 말고,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야 한다는 것이 제 철학이기도 합니다.”

 백 사장은 자신이 잘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하고,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임직원에게 모두 맡기고,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것만 제시했다. 그는 CEO로서 ‘이익의 30%를 돌려주겠다’는 약속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입하는데 주력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실제로 첫해 180억원 매출에 43억원의 이익이 났고, 저는 약속대로 14억원을 직원들에게 나눠줬습니다. 5년 동안 봉급 한 번 인상된 적이 없었던 회사에는 활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한글과컴퓨터는 또 프라임이라는 안정적인 대주주를 얻으면서, 시장의 믿음도 보너스로 받았다. ‘곧 망할 회사의 제품’이라는 불신으로 구매를 꺼렸던 고객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 결과 한글2002 버전은 역대 가장 높은 판매량을 올릴 수 있었다. 또 적자를 흑자로 돌려놓은 한글과컴퓨터 경영진에 대한 주주들의 신뢰도 큰 힘이 됐다.

 한글과컴퓨터는 이제 제품군 다양화와 문서표준과 관련된 시장 환경의 변화에 힘입어 세계시장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필요 조건을 갖추고 제2의 도전을 시작했다.

 백 사장은 또 사이버패스와 모빌리언스를 잇따라 인수해 국내 최강의 전자결제사업자의 기초를 다지며, 국내기술을 앞세운 세계시장 정복을 꿈꾸고 있다. 한글과컴퓨터의 벤처신화가 백 사장에 의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벤처인의 브리지 역할을 하는 1.9세대 벤처인

 “저는 제 자신을 1세대 벤처인과 2세대 벤처인의 브리지 역할을 하는 1.5세대 벤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 사장의 이 같은 표현은 IT벤처에 발을 들여 놓은 배경이 엔지니어링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창업한 기술벤처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벤처산업협회장이라는 위치에서 벤처업계 전반을 아우르려는 그의 의지도 작용했을 것이다.

 벤처기업의 흐름을 볼 때 2003년 벤처기업법 개정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벤처기업은 1세대, 그 이후 설립된 벤처기업은 2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백 사장은 1세대 벤처들에서 투자와 자문을 통해 경험을 축적한 뒤, 2세대의 대표적인 벤처기업인 한글과컴퓨터를 인수해 경영하면서 2세대 벤처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그러니 그가 스스로 표현하는 것처럼 1.5세대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백 사장은 이미 2세대 벤처인들의 중심에 서 있는만큼, 그의 심정을 십분 반영하더라도 주변의 평가를 고려하면 1.9세대 정도가 적당할 듯 싶다. 그가 스스로를 낮추고 있는 요건인 ‘기술기반의 벤처창업자가 아니다’는 것은 이미 2세대 벤처인에서는 어느 정도 일반화돼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1세대·2세대 벤처인 구분 없이 최근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M&A 활성화 기반 조성이다.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한 벤처기업들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위해, 아직 걸음마 단계인 벤처기업인들도 보다 공격적인 도전을 위해, 활발한 M&A가 가능한 발전적 벤처생태계 조성을 역설한다. 벤처캐피탈을 경험한 백 사장 또한 예외는 아니다.

 한글과컴퓨터의 부활에도 M&A라는 저변이 깔려 있다. 사실 한글과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워드프로세서뿐 아니라 표 계산,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 등이 필요했다.

 “개발자들은 처음에 이 모든것을 다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타임투마켓을 고려할 때 개발로 승부수를 던지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 기술력을 가진 조직을 M&A하는 방법으로 제품군을 확보했습니다.”

 백 사장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로 자신의 선택을 폄하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시장이 평가해줬다.

 “벤처기업은 말 그대로 모험 기업입니다. 대기업이 못 하는 모험을 할 수 있고, 그 모험의 결과를 자유롭게 팔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기업에 합병될 수도 있고, 기술을 팔아 남긴 자금으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수 있고, 벤처끼리 합쳐 시너지도 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백종진 사장은

 백종진 사장은 60년 10월 25일에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89년 무역회사를 설립해 100만달러 수출탑을 수상하는 회사로 키워내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승부사 기질을 살리라는 큰 형의 조언을 받아들여, 2000년 프라임벤처캐피탈 대표이사를 맡으며 벤처와 인연을 맺었다. 2003년 한글과컴퓨터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벤처인의 길을 걷는다. 한글과컴퓨터의 성공적인 경영성과를 인정받아 2006년부터 벤처산업협회(당시 벤처기업협회)의 회장직을 맡아, 발전적 벤처생태계 조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전자결제기업인 사이버패스와 모빌리언스를 차례로 인수, 현재 대표이사를 겸임하고 있다. 외부활동도 활발하다. 대통령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벤처산업협회장, 코스닥상장법인협의회 부회장, 한국GS인증협회장, 한국비치발리볼연맹 회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이사 등이 모두 그가 현재 동시에 맡고 있는 직책이다. 저서로는 ‘글로벌스탠더드’와 ‘어리석음이 마침내 산을 옮기다’ 등이 있다.

  심규호기자@전자신문, khs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