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전자공업 태동기의 중심에는 김완희 박사가 있었다. 당시 컬럼비아대에서 한국 최초의 정교수로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었던 김완희 박사는 한국전자공업 발전을 위한 보고서를 내고 국내 전자산업육성에 한 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한국전자산업의 대부’라고 불리며 30년간 국내 전자산업을 설계하고 한국 최고의 수출산업으로 키워냈다.
1966년 정부는 전자산업진흥계획을 발표하면서 전자산업을 수출전략산업으로 중점 육성할 것임을 천명했다. 진흥계획은 전자제품 수출 5개년 계획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계획의 기본 방향은 바로 전자산업의 수출전략 산업화 추진이었다. 정부는 정책 방향의 모색과 함께 체계적이고 완벽한 진흥방안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임자를 물색했다. 그 결과 당시 미국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인 김완희 박사를 초청하게 됐다. 김 박사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1967년 9월 4일부터 16일까지 입국, 체재했다.
그는 귀국 후 상공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각하의 뜻’으로 초청된 사실을 알게 됐고 이튿날부터 5일간 한국전력·대한전선·금성사 등 기업과 중앙전파연구소, 중앙공업연구소 등을 둘러봤다. 이를 토대로 그는 ‘전자산업진흥을 위한 건의서’ 브리핑 자료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준비된 자료를 토대로 9월 16일 대통령 보고에 나섰다.
이날 김완희 박사가 대통령에게 브리핑한 내용은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건의서였다. 모두 7개 항으로 된 이 건의서에서 김 박사는 우리나라가 전자공업에 대한 적응성이 우수함을 열거하고 수출전략산업으로 지정해줄 것과 함께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또 우리나라가 당면한 연구개발의 저조, 기업의 영세성 등 15개 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 △전자공업육성 자금 확보와 조기 방출 △전자공업진흥원 설치 등을 주장했다.
이후 1967년 9월 정부 초청으로 일시 귀국했던 김완희 박사는 전자산업 진흥방안수립이라는 용역계약을 맺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즉시 미국인 전자산업 전문가 10여명에게 도움을 요청, 육성방안 작성에 대한 계획안을 다듬어 나갔다. 당시 가장 성공적인 공업국가로 세계의 주목을 받던 아일랜드와 푸에르토리코를 직접 방문, 정보수집 및 분석을 추진하기도 했고 유럽 각국도 방문했다.
약 8개월에 걸쳐 내외의 200여명에 달하는 전문가의 협조와 도움으로 1968년 5월 드디어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 보고서’가 완성됐다. 그 골자는 전자공업진흥원의 설립방안과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해 줄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이었다. 이 보고서는 영문으로 총 4권, 10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한글로 번역해 차트용으로 요약하는 데 2주일이 걸렸고 1968년 8월 1일 박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자공업진흥원의 역할은 시제품 등 신제품을 직접 만들어 기업에 넘겨주며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는 일이었다. 또 일본에 편중돼 있는 기술 제휴처를 구미지역으로 전환하는 역할과 함께 기업들의 과당경쟁의 조정, 품질검사 및 품질고도화 등을 주도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기업들은 진흥원이 개발한 시제점이나 신제품을 상품화해 생산하는 일에만 전념하면 됐다.
보고서는 김완희 박사가 제2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1978∼1982년)에 취임함으로써 전자공업정책 전면에 나서기까지 15년 동안 한국 전자공업의 확장기때 일종의 복음서로 통했다. 전자공업의 기반구축에 대한 방향과 기업인들의 전자공업에 대한 신규투자 지침서 역할을 했고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을 포함해 상공부, 과기처 등 정부 부처의 정책입안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 박사는 현재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IT대학 ‘ITU(International Technological University)’ 고문을 맡고 있다.
◆김완희 박사 회고
내가 쓴 두 권의 대학 및 대학원 교과서를 서울대와 일본의 여러 대학을 포함해서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사용하게 되면서 내 이름은 전자공학을 공부하는 전 세계 젊은이에게 알려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 인생은 예기치 않은 전환기를 만나게 됐다. 그 전환기의 변곡점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우리는 1967년 처음 만날 때부터 왠지 서로 끌린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나의 학식과 전문적인 경험을 국내 전자공업과 과학기술 육성에 활용하려 했고 나는 박 대통령의 청렴한 성격과 강직한 지도력에 끌렸던 것이다. 박 대통령과의 교류는 수십회에 달하는 만남과 130통이 넘는 서신왕래로 13년 남짓 계속됐다. 나는 경제·산업·정치·사회·과학기술 등에 관해 솔직히 또 소신 있게 진언했으며, 박 대통령은 빠르고 자세한 반응을 보여주었다.(중략)
차트가 완성될 때까지 나는 상공부와 청와대 비서실에서 짠 스케줄에 따라 경제계 대표들을 만났다. 내 역할은 그들이 전자산업에 투자하도록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산업계와 경제계 대표들을 만나 전자공업에 참여하도록 권유해 달라는 박 대통령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두병 상공회의소 회장, 구인회 금성사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재호 삼호방직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만났고 나와 경기중학 동창인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과 유희춘 제일제지 사장을 만났다. 또 김성곤 공화당 재경위 의장, 서정귀 흥국상사 회장, 설경동 대한전선 회장 등 재계 인사를 만나 그들에게 전자공업의 세계적 흐름을 설명하고 선진국 정부의 지원과 육성정책 등을 소개했다.
25명이 나누어 번역하고 7명의 전문가가 쓴 차트가 완성되자, 8월 1일 오전 9시 박 대통령, 김정렴 상공부 장관, 신범식 대변인, 신동식 수석비서관, 김동수 비서관 등이 배석한 대통령 집무실에서 브리핑이 시작됐다. 3시간 30분 동안 80매의 차트가 모두 넘어갔다가 제자리에 돌아왔다. 냉방시설이 가동되지 않아 차트를 넘기는 박임숙 국장의 이마에 땀이 돋았다.
나는 이 브리핑에서 전자공업은 제품 사이클이 매우 짧아서 국내에서 진득하니 독자기술을 개발해서는 늦다고 말하고 어떻게 하든 선진기술을 도입해 수출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전자공업진흥원을 설립, 거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에 전자공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권했다.(중략)
내가 미국, 일본에 있는 여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또 한국 정부의 적지 않은 예산을 써서 작성한 전자공업육성안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가들도 훌륭한 계획이라고 인정한 작품이다. 그 후 20년이 지난 90년 초에 청와대 경제비서관 정모씨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김 박사님, 청와대에 보관된 서류 중에서 박사님이 만든 전자공업육성방안을 봤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여러 가지 기본계획, 특히 정부 정책 분야에 건의하신 육성방안은 참으로 많은 참고가 됐습니다. 20년 전에 박사님이 건의하신 것을 지금에야 이해할 수 있어서 실천에 옮기고자 합니다.”
나는 흐뭇했다. 아무리 좋은 계획과 정책이라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기관과 사람이 필요하다.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만든 건의가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전자공업진흥센터’ 또는 ‘전자공업진흥원’이라는 주무기관을 만들어 그 기관을 중심으로 전자산업을 밀고나가야 한다던 건의가 책임자를 만나지 못해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한국 전자공업 발전이 적어도 5년은 더 늦어졌다고 생각하며 이는 지금까지도 안타까운 일이다. 진흥원 설립이 중단된 것은 항간에 떠도는 것처럼 시설투자 절약 때문이 아니었으며 나의 귀국 불응과 적임자를 찾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김완희 박사 연보
1926년 경기도 화성군 오산 출생. 오산보통학교, 경기중학교, 서울대학교 졸업(공대 전기공학학사)
1953∼1955년 유타대 공대대학원 입학.
1957.7∼1979년 컬럼비아 대학 전자공학 교수
1967∼1979년 한국정부 초청으로 전자공업육성에 관한 진흥책 건의, 제3차 및 4차 전자공업육성 5개년 계획의 작성보좌
1979∼1984년 전자공업진흥회 상근회장, 전자공업협동조합 상근 이사장, 전자시보(전자신문 전신) 창간
∼현재 미국 ITU(International Technological University) 고문
<팀장 강병준 차장 배일한 류경동 권건호 황지혜 차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