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휴대폰으로 음악을 즐겨 듣는 직장인 이모씨. 한 달에 평균 10곡 정도를 구매한다. 최근 이동통신사를 옮긴 이모씨는 기존 이통사에서 구매한 음악을 새로운 기기에서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 돈을 내고 정당하게 음악콘텐츠를 즐겨왔다는 자부심도 사라져버렸다.
디지털콘텐츠의 기기 호환성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다. 돈을 내고 구입한 콘텐츠를 특정 기기에서만 재생할 수 있는 상황이 소비자를 불법 시장으로 몰아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기 호환성 문제는 인기 콘텐츠인 음악에서 가장 먼저 불거졌지만 영상, 모바일, 교육 등 다른 분야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반드시 해결해야만 콘텐츠 시장을 살릴 수 있다.
기술이 아니라 정책이 문제=콘텐츠의 기기 호환성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책상의 문제다. 그래서 더 해결하기 힘들다.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문제의 근원지다. 초기에 시장을 키웠지만 한계도 만들었다.
미국에서 애플의 온라인음악서비스 아이튠스가 시장을 장악한 이유는 단 하나다. 아이튠스에서 구매한 음악만이 그 멋진 아이팟에서 재생됐기 때문이다. 아이튠스가 싫으면 P2P에서 불법 음원을 구하면 되지만 아이팟과의 편리한 연동 기능을 버리기 힘든 소비자는 결국 아이튠스를 찾았다.
애초부터 애플이 평정해버린 미국 시장과 달리 초기에 다양한 온라인음악 서비스가 공존했던 우리나라에서 기기 호환성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잉카엔트웍스의 DRM 호환 솔루션 넷싱크를 많은 서비스가 도입하면서 차선책을 찾았지만 지금도 SK텔레콤의 폐쇄 DRM 정책은 도마에 올라 있다.
모바일콘텐츠에서는 정책적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이통사를 옮길 때마다 같은 게임을 또 돈을 내고 구입해야 하는 상황은 소비자의 짜증만 키운다.
◇비(non)DRM이 능사?=기기 호환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가장 주목받는 시도는 DRM 없는 콘텐츠다. 스티브 잡스 애플 CEO가 지난해 2월 EMI와 non DRM 음악 판매를 선언한 이후 대세로 떠올랐다.
DRM이 없으면 모든 기기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므로 기기 호환성 문제는 사실상 사라진다. 하지만 non DRM으로는 콘텐츠 수익 배분과 유통 관리 등이 여의치 않으므로 디지털콘텐츠의 강점을 살리기 힘들다.
이 때문에 음악업계는 이번 조치가 ‘차선책’임을 강조한다. 더 많은 온라인 상점에서 음악을 팔고 싶지만 애플 아이팟에서 호환되지 않는 상점은 외면당하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방안일 뿐이다.
소비자 권리도 보장하고 콘텐츠도 보호할 잠금 기술만 등장하면 언제든지 적용할 태세다. 지난 2월 뉴욕에서 고담 미디어 벤처가 주관한 조찬 모임에서도 참석한 콘텐츠 공급자의 77%가 DRM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당장 임대 서비스처럼 DRM이 반드시 필요한 분야에서 기기 호환성을 어떻게 보장할지도 고민거리다. 결국 업계 전문가들은 non DRM 대신 DRM 자체의 호환성을 높이는 시도가 다시 추진될 가능성을 높이 점치고 있다.
◇시장 먼저 키우자=콘텐츠 업계가 자사 이용자를 묶어두기보다는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애플은 CD 판매 부진으로 신음하는 음악업계에 구세주처럼 등장했지만 다른 업체와 경쟁을 통해 시장 파이를 키우지 못한 채 스스로 한계에 봉착했다. EMI를 제외한 나머지 메이저 음반사들이 애플 대신 아마존과 냅스터 등 여타 음악서비스에만 non DRM 음악을 공급하기로 하면서 철옹성 같던 애플의 아성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가정 내 PC와 TV, 휴대형 멀티미디어 기기를 모두 연동해서 콘텐츠를 이용하는 유비쿼터스 미디어 시대는 ‘콘텐츠의 기기 호환성 담보’라는 대전제 없이 구현 자체가 불가능하다. 콘텐츠 업계가 스스로 ‘소비자에게 외면받는 상품’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그래도 해결책은 있다
폐쇄적 DRM 정책으로 인한 기기 호환성 결여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는 뜨거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콘텐츠 업계가 정책상의 이유로 기기 호환성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가운데 이를 기술로 풀어냄으로써 기술력도 알리고 추가 사업 가능성도 타진하려는 것이다. 소비자는 이래저래 즐겁다.
미국의 더블트위스트는 디지털콘텐츠의 DRM을 없애는 동명 프로그램을 배포해 음악 및 영화 다운로드 시장에 파장을 일으켰다.
더블트위스트를 이용하면 애플 아이튠스에서 구매한 음악 파일을 MP3 파일로 변환해 휴대폰 등 아이팟 외의 기기에 담아서 들을 수 있다. ‘호환성 결여’라는 유료 콘텐츠 시장의 문제점을 한순간에 해결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15세 때 DVD 암호화 장치를 풀고 지난해 아이폰의 AT&T 잠금 장치를 해체하며 DRM 산업의 악동으로 불리는 노르웨이 천재 해커 ‘DVD 존(Jon)’ 존 레흐 요한슨이 개발했다. 정식 구매한 콘텐츠를 변환해 본인이 이용하거나 가까운 친구한테 보내는 개인적 용도로만 사용하므로 법적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미국에 더블트위스트가 있다면 한국엔 잉카엔트웍스가 있다. DRM 호환 솔루션 넷싱크로 유명한 잉카엔트웍스는 애플의 DRM인 페어플레이를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으로 분석한 후 EBS의 교육 사이트 ‘에듀MP3’에서 받은 콘텐츠를 아이팟에서도 재생 가능한 기술을 개발했다.
아이튠스 서비스가 진출하지 않아 사실상 돈을 내고 정식 콘텐츠를 이용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던 국내 아이팟 이용자에게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특히 이 기술을 응용해 발전시킴으로써 아이팟 외에 다른 기기의 콘텐츠 호환성도 향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관심이 모이고 있다.
잉카엔트웍스는 현재 국내 음악 서비스 사이트 두 곳과 DRM 호환을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어서 이르면 연내 서비스 범위가 확대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