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삼성 본사 지하 1층 국제회의실. 삼성그룹의 경영쇄신안이 공개된 장소다. 이날 출장길에 오른 일부 사장을 제외한 삼성그룹과 계열사 40여명 사장단이 대부분 참석했다. 국내외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발표 예정 시간은 11시였지만 10시부터 이미 국제회의실은 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원래 예정보다 약간 늦은 11시 5분. 이건희 회장이 등장하자 일순 시끄럽던 장내는 조용해졌다. 다소 숙연한 분위기에서 이 회장은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떠안고 가겠다”며 “회장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내용의 파격적인 경영쇄신안을 담담히 읽어 내려갔다. 그 자리에 있던 삼성 임직원과 대부분의 기자들은 이날 발표를 의심했다. 이건희 회장은 곧 삼성이었기 때문이다. 기자 회견 이전부터 다양한 쇄신안이 나왔지만 누구도 이 회장이 물러난다는 쪽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 회장의 리더십이 필요할 때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결국 물러났다. 일부 시민단체에서 주장했던 가장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지난 87년 그룹 총수로 오른 이후 정말 허망하게 이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손을 뗐다. 다행히 시장은 그렇게 심하게 요동치지 않았다. 일부 이 회장의 공백을 우려해 삼성 주요 계열사의 주가가 소폭 하락했지만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삼성 내부에서도 “선대 이병철 회장이 타계할 당시 일주일 동안 주가가 폭락한 사례에 비춰 볼 때 오히려 조용한 편”이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이 없는 삼성, 솔직히 그룹의 미래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는 반대로 그만큼 삼성이 지금부터 할 일이 많다는 뜻이다. 이 회장과 전략기획실의 공백을 만회하는 문제에서 꺾인 해외 신인도, 훼손된 브랜드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까지 풀어야 할 숙제가 첩첩산중이다. 게다가 바짝 움츠렸던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직원 사기도 끌어올려야 한다. 삼성의 진짜 저력을 보여줄 시점은 지금부터라는 얘기다. 그게 이 회장의 퇴임을 의미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강병준기자<생활산업부> bj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