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즐길 만한 곳이 없다’ vs ‘이게 다 불법복제 때문이다’
디지털콘텐츠 시장에서 킬러 서비스·콘텐츠의 부재는 해묵은 논쟁 중 하나다. 소비자는 아이튠스같이 강력한 합법적 유료 서비스가 없으니 쉽고 편한 음지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업자는 불법복제와 같은 왜곡된 유통구조로 인해 합법적이고 색다른 서비스를 내놓기 어렵다고 항변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킬러 서비스의 부재는 콘텐츠 산업 활성화 저해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설명했다. ‘킬러서비스 부재→소비자 이탈→수익성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콘텐츠 산업 활성화를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라는 뜻이다.
◇유료회원 100만, 왜 안 될까?=국내에서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고 운영되는 음악·영화 서비스 사이트 중 유료회원 수가 100만이 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업계는 합법적 유료화 모델이 도입된 지 5년이 넘었지만 대표주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로 △무료에 익숙한 소비자 습관 △저작권 확보의 어려움 △엇비슷한 서비스의 남발 등을 꼽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도입 초창기부터 정액제 요금이 보편화돼 대부분의 소비자는 일정한 돈만 내면 인터넷 상의 콘텐츠를 무료로 즐겨도 된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건당 500원이라도 내야 하는 콘텐츠 구매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저작권자의 디지털 유통에 대한 반감도 한계다. 김상윤 씨네21아이 이사는 “영화 디지털 유통사업을 준비하면서 소비자는 어느 정도 돈 낼 준비가 돼 있는데, 막상 저작권자를 설득하는 과정이 어려웠다”고 밝혔다.
아무리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가 나와도 그 안에 질적, 양적으로 풍부한 콘텐츠가 담기지 않는다면 소비자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합법적인 P2P서비스나 광고 모델 등이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저작권 확보가 어렵다 보니 나오는 서비스는 이름과 부가기능이 다를 뿐 큰 틀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음악 서비스는 대부분 스트리밍, 다운로드가 핵심이다. 영화 서비스는 부족한 콘텐츠 수를 채우기 위해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오래된 영화들로 짜여지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이들 서비스가 음성적인 서비스와 차별화되지 않아 소비자에게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수익성 악화, 재투자까지 어렵게=킬러 서비스의 부재와 음성적 시장의 지배는 결국 콘텐츠 산업의 수익성 악화까지 연결된다. 영화의 경우 합법적으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사이트는 서너 곳밖에 되지 않는다. 업계의 추정에 따르면 연간 불법 유통되는 영화만 100억여건에 이른다. 보여지는 영화는 많지만 돈을 버는 영화는 극소수인 구조다. 이는 수익성의 악화로 직결되고 새로운 콘텐츠 창작을 위한 재투자를 불가능하게 한다.
문봉환 영화진흥위원회 국내진흥 1팀장은 “킬러 서비스는 콘텐츠를 획기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것이 활성화돼야 콘텐츠 생산, 산업발전까지 연계가 된다”며 “아직 국내에는 그런 서비스가 등장하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생산·유통·소비 삼박자 조화 필요=킬러 서비스 부재는 원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의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어렵다.
업계관계자들은 지속적인 콘텐츠 생산과 건전한 소비자 문화가 맞물릴 때 이를 유통할 수 있는 킬러 서비스의 등장이 가능해진다고 전망했다.
박광원 엠넷미디어 대표는 “지속적으로 소비자 인식 개선 운동을 하는 이유는 전체적인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그제서야 킬러 서비스와 그 안에 들어갈 콘텐츠가 다양하게 생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장의 자정 노력만으로는 지나치게 왜곡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지원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금기훈 리얼네트웍스아시안퍼시픽 이사는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해도 건전한 유통구조를 저해하는 서비스가 많아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이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정책 의지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게임 시장, 신인이 없다
게임 시장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킬러 콘텐츠 부재는 심각하다. 서든어택이나 리니지 등 인기게임이 줄줄이 있는데 킬러 콘텐츠가 없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 시장에는 새로운 킬러 콘텐츠, 즉 성공한 신작이 없다.
인기 게임 순위를 보면 이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게임 전문 매체인 게임트릭스가 매주 발표하는 PC방 인기 게임 순위를 보면 1위가 서든어택이고 그 뒤를 이어 스타크래프트,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리니지2, 스페셜포스가 5위까지 차지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게임들이지만 출시 시점이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0년 가까이 지난 올드보이들이다. 6위부터 10위까지를 보더라도 리니지나 워크래프트3 등 이제는 고전 축에 들 게임이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다. 그나마 신작 십이지천2가 10위에 턱걸이 하고 있어 위안을 준다.
게임이 영화나 음악 등 다른 문화 콘텐츠 산업에 비해 라이프사이클이 길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킬러 콘텐츠가 없다면 전반적인 산업의 위축을 가져올 수 있다. 전문가들은 성공한 신작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게임 업계의 보수성에서 찾는다.
위정현 중앙대 교수는 “현재 한국의 게임 산업은 안전제일주의에 빠져 있다”며 “세계 온라인게임 시장의 독창성을 주도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그 밥에 그 나물 격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롤플레잉게임(RPG)은 리니지나 월드오브워크래프트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고 전투(FPS)게임은 서든어택과 스페셜포스에서 진화를 멈췄다. 일각에서는 “새로 나오는 게임을 보면 엔진이나 제동장치, 현가장치 등 내부 핵심 부품은 10년 전 그대로인데 디자인과 색상만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자동차를 보는 느낌”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신작 부재는 외국 게임 수입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미국 블리자드의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물론이고 중국 게임 완미세계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또 최근에는 드래곤볼이나 몬스터헌터 등 일본 게임 수입 계약도 줄을 잇고 있다. 스타크래프트2나 워해머 등 세계적 화제작이 나오면 국내 시장은 아예 외산 게임이 주류를 이룰 분위기다.
게임 업계는 그나마 엔씨소프트의 아이온이나 웹젠의 헉슬리 등 하반기 출시 예정인 대형 신작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올해 안에도 성공한 국산 게임이 나오지 않는다면 ‘온라인게임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이 무너질 날도 머지않았다는 게 게임 업계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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