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후배 L모 기자와 야구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팀 타율을 줄줄 외는 그 후배는 골수 ‘부산 갈매기(롯데 자이언츠 팬)’다. 롯데의 초반 돌풍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주제는 ‘야구가 왜 우리를 열광시키는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담론으로 흘렀다.
그는 야구의 매력을 이렇게 말했다. “야구가 단체 스포츠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개인 경기에 가까워요. 타석에서 타자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마운드의 투수 역시 마찬가지죠. 오로지 배트와 공 하나만으로 하는 고독한 승부, 이 짜릿함이 정말 미치게 만들어요!”
야구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다. 지난 1980년대 시작된 국내 프로야구는 다른 스포츠가 차지하지 못한 단단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연고제를 바탕으로 한 열혈 지역팬은 물론이고 야구라는 인생, 롯데라는 종교까지 만들어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 야구야말로 진정한 ‘드라마성’을 지니고 있다. 9회 말 투 아웃. 타자의 한방은 다 죽어가던 팀을 살려내고 혼신의 힘을 다해 뿌리는 그의 슬라이더는 경기를 원점으로 돌린다.
야구라는 드라마가 브라운관에서 살아나고 있다. OBS경인TV가 제작·방송하고 있는 ‘불타는 그라운드’(전동철 연출)는 국내 최초의 스포츠 리얼 드라마라고 불릴 만한 작품이다. 지난 3월 처음 방송을 시작한 이 프로는 프로야구단 SK와이번스를 주인공으로 한 스포츠 다큐멘터리. 현재까지 단 7회가 방영됐지만 이 프로그램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팬덤은 엄청나다. 야구팬들은 이 작품을 다큐가 아닌 리얼 드라마로 부르며 인터넷에 수많은 댓글을 달고 있다. 지금까지 스포츠 다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독 이 프로만을 드라마로 명명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불타는 그라운드’의 주인공은 ‘야구’가 아닌 ‘선수’기 때문이다. 승부에 집착하는 다른 다큐와는 달리 이 작품은 구단과 선수들의 만들어낸 그들의 이야기에 무게 중심을 둔다. 그래서 불타는 그라운드의 카메라는 항상 공이 아닌 선수를 향한다. 덕 아웃, 숙소 등 선수가 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뷰파인더는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촘촘히 기록한다.
이런 노력 끝에 탄생한 화면은 생생하다. 숙소에서 은밀히 털어놓는 선수의 울분과 감독 한마디에 2000회씩 방망이를 휘둘러야 하는 그들의 땀방울이 가감 없이 담긴다. 특히, 한 끼에 2000원짜리 밥을 먹고 견뎌야 하는 2군 선수들의 애환 등 무대 이면의 슬픈 현실 묘사는 압권이다.
지난 ‘내일을 향해 뛰어라’ 편에 소개된 이영욱 선수의 2군 생활은 네이버에서도 화제를 낳았다. 1군과 2군을 왔다갔다 하는 그가 성적에 대한 부담 때문에 대구에 있는 부인을 만나지 못하는 장면에서는 많은 네티즌이 함께 울었다. 전동철 PD는 “일주일에 엿새 이상 취재를 벌이다 보니 선수와 가족 같이 친해졌다”며 “에피소드도 많아 자신이 홈런을 치면 OBS 아나운서와 미팅을 시켜달라고 한 나주환 선수가 실제로 그날 공을 담장 밖으로 날린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약속을 지키기로 한 제작진은 조만간 아나운서와 나주환 선수와의 미팅을 프로그램에 담을 계획이다.
불타는 그라운드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질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로 치면 지금까지가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전반전이었다면 앞으로는 선수들의 고민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후반전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반전을 예측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보인다. 성적이 좋으면 좋은 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는 계속될 것이다.
한정훈기자 exis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