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골프의 비약적 성장은 그동안 게임산업에서 이따금 시도돼오던 가상현실(VR) 기술이 한국 골프시장을 통해 활짝 꽃을 피운 것으로 풀이된다. 스크린골프의 성장과정을 보면 어떠한 정부지원, 대기업의 시장참여도 없이 중소기업들이 자생적으로 뻗어나가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이 놀라운 현상은 지난 90년대 후반 PC방이 골목마다 생겨나면서 거대한 e스포츠(PC게임) 시장이 형성된 사례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스크린골프 제조사는 자신들의 업종이 e스포츠보다 훨씬 진보한 형태의 레저산업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e스포츠는 손가락으로 마우스만 움직이는 데 비해 스크린골프는 온 몸으로 골프클럽을 힘껏 휘두르기 때문에 실질적 체육단련 효과가 있다. 또 e스포츠가 재미를 위해 비현실적 환경설정을 흔히 사용하는 데 비해 스크린골프는 반드시 실존하는 골프장을 모델로 사용자가 착각할 정도의 극사실주의 가상현실을 지향한다.
이러한 차이점을 감안할 때 스크린골프는 기존 e스포츠의 연장선이 아니라 ‘VR 기반의 신종 스포츠’ 시장으로 간주해야 타당하다. 이러한 가상현실 스포츠는 간략하게 줄여서 ‘V스포츠’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다. 본지 1월 27일자 8면 기사 참조
스크린골프방의 놀라운 확산은 골프뿐만 아니라 야구·농구·마라톤 등 여타 스포츠의 VR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골프가 많은 돈과 시간 여유가 필요한 귀족운동인 탓에 V스포츠로 진화가 빨랐지만 더욱 간편한 운동스포츠도 가상공간으로 속속 들어오는 추세다. 스크린골프의 약진을 눈여겨보던 KT는 지난해 스크린골프 시장에 대기업 최초로 뛰어들어 달리기(사진)·사이클·야구·사격 등을 개발하고 있다. KT는 우선 스크린골프 시장에서 자리를 잡으면 경찰에서 사용하는 모의사격 훈련게임, 유명야구장과 투수 동작까지 재현한 야구게임을 보급해서 새로운 콘텐츠 시장을 개척한다는 계획이다. KT의 한 관계자는 “고성능 프로젝터와 HD급 영상기술의 보급에 따라 가상공간에서 스포츠를 체험하는 레저시장이 새롭게 등장했다”면서 “스크린골프의 성공사례처럼 여타 V스포츠도 한국이 가장 트렌드를 선도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크린골프, 뭉쳐야 산다=최근 일부 유흥업소에서 스크린골프를 하더라는 선정적 기사가 나오면서 스크린골프 시장에 찬물을 끼얹은 사례가 있었다. 사실 노래방 기계는 노래방에 설치되든 주점에 들어가든 제조업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스크린골프가 유독 표적이 되는 배경은 골프에 대한 호기심과 정서적 반감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관련 업계를 대변할 이익단체,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골프존·DMBH·가미테크 등 기업대표는 스크린골프 업계를 아우르는 단체 설립을 조심스럽게 거론하는 모습이다. 김영찬 골프존 사장은 “그동안 사업확장에 매진하면서 동종업체 간 협력이나 정보교류에 소홀했다. 이제 스크린골프 기업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할 시기”라고 내다봤다. 다른 업체들도 스크린골프 시장을 대변하는 단체 설립의 필요성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스크린골프의 미래=불과 10년 전만 해도 대부분 사람들은 PC기반의 골프게임이 발전해서 VR기술을 이용한 스크린골프방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예측은 하지 못했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불과 몇 년 새 골프의 개념을 바꿔 놓았다. 골프는 이제 실외는 물론이고 실내에서도 할 수 있는 전천후 스포츠가 됐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뒤에 스크린골프가 어떻게 진화할지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VR의 체험강도를 높이기 위한 HD급 고해상도 제품 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다. 지금은 스크린에 비친 골프장 전경이 컴퓨터 그래픽임을 한눈에 알 수 있지만 몇 년 내 실사영화와 같은 골프장 풍경을 즐기게 될 전망이다. VR의 다음 단계는 골프장의 실시간 전경을 원격지의 스크린에 비춰주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페블비치에 비가 내리면 서울 강남의 골프방에서도 똑같은 날씨 속에서 게임을 한다. 통신대역폭의 확장에 따라 네트워크 기반의 일대일 골프게임이 일상화된다. 한국의 기러기 아빠와 미국 LA의 부인이 가상 필드에서 함께 골프를 즐기는 모습은 흔해질 것이다.
스크린골프의 기술적 진화는 이쯤에서 멈출 것인가. 멀리 가지 않고도 골프를 실감나게 즐기려는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 VR를 이용한 스크린골프는 오락과 레슨용으로 가치가 있지만 한계 또한 분명하다. 어떤 골퍼도 스크린골프방에서 올린 점수가 실제 골프장에서 올린 점수와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정교한 골프센서와 고해상도 골프장 사진을 연계해도 골퍼는 VR로 뻗어나간 공이 실제로는 벽을 맞고 떨어졌음을 분명히 안다.
골프의 진정한 재미는 다양한 상황에서 자기 판단대로 골프클럽을 휘둘러 원하는 위치에 공을 보내는 데 있다. 골프 애호가, 특히 한국의 골퍼들은 그 진정한 희열을 맛보기 위해 불원천리 먼 곳에 있는 골프장을 찾아가는 수고와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정통 골퍼의 시각에서 스크린골프는 골프장에 공을 보내는 시늉만 하는 가짜일 따름이다. 스크린골프방에서 때린 샷을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 골프장으로 날려 보낼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