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자산업 초기, 산업 기틀을 닦는 데 다국적 기업 즉 외자 기업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1960년대 말까지 국내에서 생산한 전기전자부품은 대략 50종이었다. 주요 품목으로는 저항기·축전기·스피커·브라운관·트랜지스터·집적회로(IC) 등을 꼽을 수 있다. 세트로는 AM·FM 겸용 라디오와 흑백TV를 비롯한 냉장고·선풍기·카오디오까지 다양했다. 일부는 자체 브랜드로, 일부는 수출에도 나섰다. 당시 전자제품 국산화율을 보면 1966년 말 평균 37%였던 것이 1971년 말 40%대에 근접할 정도로 수출과 국산화는 당시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숙제였다.
생산 품목이 다양해지고 국산화가 빠르게 진전된 배경에는 미국과 일본을 위시한 다국적 기업의 직·간접 투자와 선진 기술 도입 등이 주효했다. 특히 ‘외자도입법’이 제정되면서 국내에 다국적 기업이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기대와 우려 속에도 이들 외자 기업은 산업 발전에 나름의 역할을 했다.
외자도입법의 목적은 한마디로 원리금 상환 부담이 적은 다국적 기업의 직·간접 투자를 유치하는 데 있었다. 도입법이 제정되면서 다국적 기업도 전쟁 국가로만 알려진 ‘코리아’를 시장과 생산 거점으로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1969년 말까지 국내에 설립된 다국적 기업은 100% 단독 투자 형태가 10개사, 국내 자본과 합작이 12개사로 총 22곳이었다. 이 가운데 단독 투자 1개사와 합작 투자 2개사만이 ‘외자도입법’ 시행 이전에 출범할 정도로 이 법이 외국 자본을 국내에 유입하는 데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100% 단독 출자 기업은 1966년 4월 실리콘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생산을 위해 설립한 ‘페어차일드’가 1호를 기록했다. 그러나 외자도입법을 적용받은 첫 기업은 IC와 다이오드 제조 기업인 ‘시그네틱스’였다. 이때가 1966년 7월이다. 이어서 모토로라를 비롯한 IBM, 컨트롤데이터 등 컴퓨터 관련 부품 회사가 상륙했고 TV튜너·릴레이·마그네틱 헤드 등 전자 부품 분야에서 오토일렉트로닉스·AMC·코미 등이 가세했다. 1960년대 진출한 100% 단독 출자 기업은 모두 미국계였다.
국내 자본과 합작해서 설립한 기업으로는 가전 분야에서 중앙상역·남성흥업·고미산업·한국마이크로전자·한국도시바·삼성산요전기·삼성NEC 등을 꼽을 수 있다. 유리관을 생산하던 세방전자도 이때 출범했다. 외국 기업과 국내 기업의 합작 비율은 정부가 아직 외국 자본의 비율을 규제하지 않던 때라 25 대 75에서 반대로 80 대 20까지 다양했다. 합작 기업은 미국계가 7개사, 일본계가 5개사였다.
투자 규모는 모토로라가 단독 출자한 모토로라 한국법인이 754만달러, 삼성물산과 일본 산요전기가 합작한 삼성산요전기가 600만달러, 역시 삼성물산과 일본전기(NEC)가 합작한 삼성NEC가 300만달러 등으로 상위그룹을 형성했다. 1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한 곳으로는 페어차일드, 시그네틱스코리아, 한국도시바 등이었고 한국IBM은 초기에 95만달러를 투자했다가 69년 그 4배인 380만달러를 증자했다.
다국적 기업 생산 품목을 보면 단독과 합작 투자를 불문하고 미국계는 IC·트랜지스터 등 반도체와 컴퓨터 분야가 주축이었고 일본계는 저항기·축전기·트랜스포머·스피커 등 전자부품 분야가 주종을 이뤘다. 다국적 기업 가운데 초기 투자 규모가 컸던 모토로라 한국법인은 미국 본사 최고책임자가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투자의향서를 전달했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설립한 다국적 기업이 모두 정부와 일반인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것만은 아니었다. 1968년 1월 현지법인이 출범했던 오크일렉트로닉스가 진출 1년 만에 철수해 버린 사건은 다국적 기업의 행로가 결코 순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 다국적 기업은 국내 전자 산업의 기틀을 잡고 부족한 기술력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60년대 외국에서 들여온 기술은 대개 라디오·TV·냉장고·자동 교환기·케이블 등 원천기술 없이도 쉽게 조립 생산이 가능한 분야였다. 기업별로 보면 금성사가 히타치(라디오·TV·냉장고), 지멘스(교환기), 고가전기(케이블) 등에서 가장 많은 기술을 들여왔다. 금성사는 특히 주력 품목의 생산 거의 모두를 외국 기술에 의존했다. 동양정밀은 NEC·다무라전기·고덴제작소 등 주로 일본 기술을 들여와 산업 전자기기 분야에서 굳건한 위치를 지켜 나갔다. 품목별로는 라디오·TV가 가장 많았는데 금성사(히타치) 외에 한국마벨(RCA), 대한전선(도시바), 동남전기(샤프) 등이 조립 기술과 자재 일부를 들여와 수출 또는 내수용 완제품 생산을 시도했다.
기술 도입 조건은 계약 당시의 경상비 외에 판매액의 2∼3%, 또는 세트당 3∼5달러 수준의 로열티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지금 따져 보면 국내 기업에 다소 불리한 내용이 많지만 이들 기업이 일천했던 초기 국내 전자 분야 기술력에 원동력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외자 기업, 초기 전자 산업 수출 첨병
1960년대 중반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배경은 낮은 임금이었다. 당시 선진국은 원가 절감 방안의 하나로 임금이 낮은 저개발국에 생산 거점을 두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정부도 전자산업이라는 말조차 생소했지만 관련 제도를 개정해 다국적 기업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주변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이 무렵 국내는 대만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아 투자의 최적지로 지목되던 때였다. 외자 기업의 포문을 연 시기와 업체는 1966년 미 시그네틱스와 페어차일드였다. 이어 1967년 모토로라가 100% 투자해 반도체 조립 공장을 건설했다. 이를 기점으로 국내 전자공업은 외국인 주도의 수출 형태로 변했고 트랜지스터 조립 등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한 걸음 올라설 수 있었다. 상공부는 때맞춰 1967년 7월 고시 제3143호로 ‘외자도입법’을 제정해 단독 또는 합작 투자 인가를 받은 전자 제품 업체에 일반 무역 절차와 달리 수출입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 주는 등 지원책을 펴 나갔다. 물론 이들 외자 기업에 특혜를 주는 조건으로 정부는 전량 국내에서 생산한 부품과 전자 제품에 대해서는 수출을 조건으로 붙였다.
이 때문에 초기 외자 기업은 1960년대 중·후반 전자 수출의 ‘물꼬’를 튼 주역이었다. 1966년 당시 전자 부문 수출은 359만6000달러에 머물렀지만 불과 2년 만인 1968년 1943만달러로 5배 가까이 급신장했다. 이어 1971년 실적이 8860만달러로 원래 목표 1억달러에 못 미쳤으나 전년도 실적 5496만달러에 비해 61%나 신장했다. 이 중에서 100% 투자한 외자 기업의 수출 실적은 1970년 2992만달러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던 오원철씨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외국 100% 투자 회사는 한국에서 부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데 일감이 밀릴 정도였습니다. 재미를 보자 너도나도 시설 확장을 서둘렀지요. 외국에서 시설을 도입할 때에는 경제기획원 허가가 필요하고 또 허가를 내주기 전 그 기계가 공장 가동에 필요한지 기술 검토를 상공부에 의뢰하게 돼 있는데 외국 회사는 100% 투자회사라는 이유로 행정 절차 없이 덮어 놓고 기계장치를 김포공항으로 수송해 왔습니다. 산업계에서 행정 불만이 쏟아져 나오자 아예 장관 결재가 필요 없는 ‘계장 전결’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행정 절차를 간소화했습니다. 한마디로 수출 제일주의가 국가 시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셈이었지요.”
전자산업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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