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은 사라져도 열정은 살아있다

노장은 사라져도 열정은 살아있다

 ‘전자업계의 백전노장이 떴다.’

 1980·90년대 전자업계를 호령했던 원로 CEO와 엔지니어들이 지난 23일 구미 전자단지를 ‘급습’했다. 현장을 떠난 지 길게는 10년이 넘었지만 구미 산업단지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 이미 예순을 넘긴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현장에서 뛸 당시 못지않게 열정과 관심을 보여 의례적인 공장 방문 정도로 여겼던 주최 측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구미에 실제 머문 시간은 5시간 남짓이지만 구미시청에서 LG마이크론·LG전자 PDP 모듈 생산라인과 LCD·모니터 조립라인을 모두 둘러볼 정도로 숨가쁜 일정을 소화해 냈다. 전자정보인클럽 주최로 지난 23일 구미를 방문한 42명 전자업계 원로의 ‘짧지만 값진 하루’를 동행 취재했다.

 

 오전 8시. 나정웅 전자정보인클럽 회장(KAIST 명예교수)을 시작으로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버스 출발 장소로 반백이 된 노장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조희재 그린우드21 고문, 이광춘 신라엔텍 대표, 유영준 특허법인 지명 고문, 황영국·전완수 전자정보인클럽 부회장, 이태길 이타자리 대표 등 언뜻 현 직함과 외모로 봐서는 평범한 어르신 정도로 보이지만 한 때 전자업계에서 한가닥 하던 인물이 다소 이른 아침이지만 버스에 올랐다.

 이어 구미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30분. 구미시청에서 섬유산업을 시작으로 국내 최대의 전자·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한 구미시의 짧은 브리핑을 듣는 것으로 일정이 시작됐다. 구미 산업단지는 지난해 수출 350억달러를 달성하는 등 전국 수출의 10% 가량을 차지했다. 또 휴대폰·LCD·PDP산업을 중심으로 세계 최대의 디지털전자클러스터로 자리매김했으며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육성 중이라고 구미시 측은 강조했다.

 시청을 떠나 이어진 첫 방문지는 LG마이크론. 이 때부터 노장들의 내공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종합 부품업체인 LG마이크론의 장·단점에서 리드프레임(LF), 브라운관과 모니터용 섀도우마스크, 최근 전략 품목으로 육성 중인 ‘테이프 서브스트레이트(TS)’까지 세부 품목을 거론하며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첫 방문한 LG마이크론 2공장인 리드프레임 생산라인에서도 원가 절감 방안, 원재료가 대부분 일제라서 생산성 향상에 한계가 있다는 식의 전문가급 식견으로 담당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는 LG전자의 PDP와 모듈라인, LCD TV 조립라인 방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찰단은 PDP 모듈 라인에 큰 관심을 보였다. LG전자 PDP 모듈라인은 세계 최고의 공정을 갖췄다고 평가될 정도로 경쟁력을 인정받았지만 이들 원로 엔지니어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갈 수 없었다. PDP와 LCD 패널 두께에서 오는 품질 차이에서 PDP가 청정을 강조하지만 반도체에 비해서 청정 수준(클래스)이 떨어지는 배경까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 쉼없이 오갔다.

 시찰단을 안내한 현장 직원이 날선 질문에 진땀을 흘렸으며 오히려 즉석에서 해법을 제시해 역시 백전노장은 죽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LCD·모니터 조립라인에서는 생산과 공정 혁신으로 42인치 기준으로 10시간에 4000대를 양산한다는 설명에 다들 놀라워 했다.

 곽홍식 LG전자 상무는 “처음에는 단순한 산업시찰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들의 열정과 관심 그리고 전문성에 새삼 놀랐다”며 “이들 인력이 가진 노하우와 전문성을 정년 후에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정부 혹은 전체 산업계 차원에서 고민할 때”라고 아쉬워했다.

 구미=강병준기자 bj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