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인 클리셰까지 아름답게 만들다.’
최익환 감독. 그는 충무로에서는 드물게 이론과 현장 경험을 두루 겸비한 감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영화아카데미 초빙 교수를 할 정도의 해박한 영화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호러 중 명작으로 불리는 여고괴담 시리즈(여고괴담4: 목소리)를 마무리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고괴담 이후 그는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 기간 동안 봉준호, 최동훈 등 또래 감독들이 괴물, 타짜와 같은 걸작을 만들었지만 그에 비견되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최익환의 이름은 어떤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3년간의 침묵을 깨고 돌아왔다. 돌감(돌아온 감독) 치고는 손에 쥔 작품이 다소 생뚱맞다. 영화도 아니고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최 감독이 3년간 숙성시킨 영화 ‘그녀는 예뻤다(김수로·강성진·김진수·박예진 주연)’는 실제 촬영한 화면 위에 그림을 그려 넣는 ‘로토스코핑’ 기법을 사용한 애니그래픽스 무비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결합한 이 기법은 ‘와니와 준하’의 에필로그 장면에 쓰인 바 있지만 영화 전편에 모두 사용되기는 한국 영화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로토스코핑 기법은 실제 동작을 가지고 화면을 만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화면을 얻을 수 있다.
최 감독이 로토스코핑 기법을 생각한 데는 영화 형식 파괴와 같은 철학적인 거대 담론이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감성적인 이유가 강했다. 사각 관계라는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데 동화 혹은 우화와 같은 느낌이 필요했고 배우의 캐릭터에 함몰되지 않는 영상을 위해서는 디지털로 무장된 애니메이션이 적격이라는 판단이 앞섰다. 감독 그 자신도 기자 간담회에서 “디지털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아날로그 적인 느낌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이 기법을 사용했다”며 “관객의 즐거움을 위한 혁신적인 도전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감독은 영화에 대한 의미 부여를 애써 자제했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멋이 있다. 맛으로 비교하자면 이른 아침 마시는 아메리카노 커피 같다고나 할까. 사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상하다 못해 이해 불가다. 일권(김수로), 태영(강성진), 성훈(김진수) 등 절친한 남자 친구 3명이 연우(박예진)를 시간 차를 두고 사랑하고 결국 한 명이 그녀를 택한다는 줄거리는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삼각 관계에 익숙한 국내 관객에게는 다소 불쾌하다.
그러나 이런 상투적인 줄거리와는 달리 영화는 꽤 즐겁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교묘히 무너뜨리는 로토스코핑의 마법은 배우들의 열연과 맞물리면서 감정의 포르티시모 곡선을 그린다. 특히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보는 배우들의 코믹 연기는 우리를 영화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영화 첫 장면. 미국 유학 중 결혼 상대자를 찾기 위해 잠시 귀국하는 일권은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에게 추파를 던진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미국 물을 먹은 여자 다리가 더 예쁘다는 농담에서부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 놓는다. 일반적인 한국 영화에 나오는 바람둥이 컨셉트 장면이지만 이를 본 관객은 초입부터 자지러진다. 김수로의 손짓 하나를 꼭 빼닮은 캐릭터의 능글맞은 표정 때문이다. 다음달 12일 개봉하는 그녀는 예뻤다는 방학을 앞두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붙는다. 하지만 김수로를 비롯한 배우들의 명연은 헐크도 무너뜨릴 힘이 있어 보인다. 한정훈기자 exis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