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CEO]이홍배 씨앤드에스마이크로웨이브 사장

2008파워CEO

[파워CEO]이홍배 씨앤드에스마이크로웨이브 사장

 하늘은 흐렸다. 그를 만난 날, 구름은 낮게 드리워지고 비는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마침 음산한 도심 풍경을 뚫고 한 두 방울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출근시간인데도 어쩐 일인지 그의 낯빛이 밝았다. 어두운 하늘과 대비돼 그의 얼굴은 더욱 빛났다. 갸름한 얼굴에 오똑한 코, 수줍은 듯 하면서도 활기찬 그의 어법은 단숨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다.

 묘한 친근감이 풍기면서 흡사 세상사를 초탈한 듯한 그의 얼굴이 족히 사람 몇은 단숨에 빨아들일 것 같았다.

 씨앤드에스마이크로웨이브 이홍배 사장(43). 그와의 만남은 경기도 성남의 본사가 아닌 서울의 삼성동 자회사 사무실에서 시작됐다. 아직은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인 이른 시간, 바쁘다는 그를 끌어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출근 시간 전이었다.

 

 ◇ 직원 셋과 함께 창업하다

 

 “창업이요?”

 이른 아침부터 자신의 얘기를 묻는 게 어딘지 어색했다. 하지만 어색함이란 것은 정면 돌파하는 것이 최고다. 어떻게 회사를 설립할 생각을 하게 됐냐고 불쑥 들이밀고 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척 했다.

 “잘 될 것 같아서지요. 뭐 인생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요?”

 간결했다. 창업이란 것을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오랫 만이었다. 오랫 동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고 했다. 일단 되겠다 싶으면 시작하면 됐지 뭘 그리 길게 생각할게 있느냐는 투다.

 이쯤되면 그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술술 나오는 얘기에 빠져들다 보면, 그는 때 이른 장마 비처럼 경기 예측이 어려운 요즘에도 말 그대로 낙천주의자였다. 아니, ‘근거 있는’ 낙관주의자다.

 그가 회사 생활을 시작한 90년대 중반은 기술 수요가 많은 때였다. 통신사업자간 인수합병(M&A)이 있었고, 이에 따른 시스템 통합을 위한 기술개발이 필요했다. 당연히 통신사와 협력해 기술을 개발하는 프로젝트가 많았다. 국가적으로도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M&A와 기술발전에 의한 물량이 많은 때였다.

 기술개발과 생산, 납품, 유지보수, 다시 기술개발로 이어지는 사이클은 엔지니어 출신 기업인에겐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기술 수요가 널려 있었다. 의뢰가 들어온 기술만 개발하는데도 일손이 부족했다. 2∼3개월에 1∼2개 품목(기술)을 개발하곤 했다. 연간계획을 세울 필요조차 없었다.

 그가 창업에 자신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서울대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가 ‘근거 있는’ 낙관주의자가 된 연유가 거기에 있었다. 경기가 어렵다고 하는 지금에 와서도 그런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신뢰가 매출로 이어지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가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한원텔레콤이었다. 박사학위 공부와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택한 직장이다. 마침 통신 인프라 구축이 막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의 눈에 중계기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의 인프라 구축과 통신기술을 흐름을 감안하면 중계기의 수요는 확실할 것이란 판단이 섰다. 다행히 회사에서도 사업 아이템이 겹치지 않아 후원을 했다. 같이 일했던 연구원 3명도 흔쾌히 동참했다.

 직원은 자신과 연구원 셋이 전부였다. 기술력이 있는데 뭘 못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마침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인 S사에서도 중계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이통사가 요구하는 스펙에 맞춰 개발만 해주면 모든게 해결될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기술개발에만 매달렸다. 기술 개발만 해놓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은 탓이다. 접촉식(RF) 중계기다. 국내 최초로 초소형 중계기도 개발했다.

 하지만 생산이 문제였다. 기술개발에 따른 생산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 결과는 대규모 리콜로 돌아왔다. 최대의 위기였다. 창업한지 얼마 안되는 기업에게 4억원 가량의 리콜 물량은 치명적이다. 기술 개발의 문제가 아닌 생산과정의 문제였다. 두말 없이 전량 리콜을 했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던가. 이통사는 그런 그에게 신뢰를 보내줬다. 다른 연구개발 용역으로 용기를 북돋워줬고, 매출은 더욱 늘었다. 매년 50∼100% 가량의 매출증가는 물론 영업이익도 크게 증가했다.

 기술 트렌드를 읽는 그의 눈도 사업 확장에 큰 도움이 됐다. 2004년에는 3세대(G) 이통서비스와 위성디지털멀티미디어(DMB)서비스가 예고되면서 사업자의 니즈를 예측, 한발 앞서 개발한 중계기가 매출에 큰 도움이 됐다.

 신뢰가 쌓인 덕분이었다. 자연스럽게 통신사업자측과 스터디 해가면서 제품을 개발하게 됐다. 2G와 3G 통합형 듀얼 중계기도 개발했고, DMB 갭필러, 와이브로 중계기, 마이크로웨이브 중계기, 지능형 열차제어시스템, RF 쇼워 등 중계기 제품 라인업을 갖추게 됐다.

 

 ◇사업 다각화에 나서다

 

 낙천주의자인 그에게도 요즘 고민이 생겨났다. 통신비 인하가 정치권의 공약으로 채택되면서 산업계에 여파가 몰아치고 있기 때문이다. 신규 통신서비스가 속속 선보이고, 결합서비스도 하나 둘 채택되면서 마케팅 요인이 발생한 데다 보조금도 풀렸다.

 통신 요금 20% 인하 공약에도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마케팅 증가 요인이 발생한 데다 요금 인하도 해야 한다. 제일 먼저 투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최소한의 설비투자마저도 납품단가 인하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정치권의 헛기침이 협력사에 직격탄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해법은 무엇일까. 두 가지 해법을 수립했다. 하나는 해외사업을 통해 판로를 확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다각화다. 현재 유럽의 대형 통신사와 중계기 납품 협상을 벌이고 있으며,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예정이다. 유럽뿐만이 아니다. 아시아와 미국에도 사무소를 열었다.

 홈네트워크 사업은 그가 가장 차기 수익모델로 키우고 있는 사업이다. 또 하나는 음성인식 사업이다. 두 분야는 현재도 많은 기업들이 치열한 선점 경쟁을 벌일 정도로 초기 시장이다. 너무 경쟁이 치열해 일각에서는 레드오션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의 생각은 그러나 다르다. 일부 기업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시장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너무 일찍 진입해 체력을 소진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부터가 블루오션에 진입하는 시기라는게 그의 생각이다. 융합시대가 열리는 지금이 적기라는 것이다.

 

 ◇ 퇴직 없는 일터 일구고파

 

 요즘 그가 꾸준히 애착을 갖고 하는 게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조기축구다. 10여년 전부터 조기축구를 해왔지만 근래 들어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축구장은 흡사 인생사의 축소판이다. 혼자만 잘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팀워크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가정이 특히 그렇다. 대학 1학년 때부터 10년 동안 사귄 끝에 결혼한 아내가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그와 아내, 가족의 팀워크가 없었다면 창업도 어려웠을 것이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사장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포지션에 맞는 인물을 기용하고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팀워크가 성공의 가장 큰 요소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조기축구를 하다보면 1주일간의 생활을 반성하게 된다. 전후반 뛰는 내내 일주일 동안 무엇이 모자랐고 아쉬웠는지를 복기하게 된다. 반성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다. 축구장은 그래서 또다른 그의 일터다.

 기업을 하면서 소망하는 게 하나 있다. 성공한 기업인이라면 사회 문제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가 그렇고, 교육도 그렇다. 해결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은 게 그의 소망이다.

 그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는 게 있다. 바로 세컨드라이프에 관한 것이다. 세컨드라이프의 가장 큰 문제는 조기 퇴직이다. 조기 퇴직은 인생에 있어서 먹구름 같은 존재다. 그런 점에서 그는 퇴직 없이 일할 수 있는 기업을 일구는 게 작은 소망이다.

 회사와 내가 하나라는 ‘아사일체(我社一體)’라는 경영철학을 굳힌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처럼 사회 분위기가 조기 퇴직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나이에 상관 없이 60, 70세가 되도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CEO의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2∼3년 동안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나면 언제든지 자신의 전공인 기술담당 임원(CTO) 역할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CEO라는 자리는 그릇에 맞는 인물이 올라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성공요?”

 기업도 이제 그만큼 일궜으니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인데,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출 500억원에 순익도 50억 안팎을 올리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했다. 한 번도 성공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성공이란 단어는 자신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공이란 용어를 사회 문제 하나 해결했다고 생각할 때 입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금의 일터를 더욱 소중하게 가꾸겠다고 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모든 직원이 나이에 상관 없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그런 기업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 역시 그런 일터에서 직원의 한 사람으로 언제까지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박승정기자@전자신문, sjpark@>

 사진=윤성혁기자@전자신문, shyoon@

 

 <이홍배는...>

 서울 길동에서 1966년 태어났다. 동국대 부속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전기공학 학사·석사·박사를 받았다. 한원에 들어가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MCOMM사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이후 1999년 씨앤드에스마이크로웨이브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코스닥에 상장도 했다. 대통령 산업포장 벤처기업대상도 수상했다. 10년 연애한 끝에 결혼한 와이프와 아직은 애틋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아들과 딸이 자랑거리다.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 주는 5명의 술 친구가 있어 언제나 부자다. 기업을 하면서 소망하는 게 있다면 퇴직 없이 일할 수 있는 그런 일터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