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미국 HP는 IT서비스업체 EDS를 139억달러, 우리 돈으로 14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HP가 자사 서비스사업 부문의 한 해 매출 166억달러와 맞먹는 비용을 인수합병(M&A)에 투입하는 모험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버·PC·프린터 등 하드웨어(HW)에서 각종 기업용 소프트웨어(SW)에 이르는 폭넓은 IT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는 HP는 EDS 인수로 이들 솔루션 및 서비스와 결합해 단순한 IT공급자가 아닌 글로벌 비즈니스파트너로서 위상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M&A를 통한 다국적 IT기업의 ‘몸불리기’는 새삼스러운 이슈가 아니다. 앞서 언급된 HP는 이미 지난 2001년 250억달러 규모에 이르는 컴팩컴퓨터 인수를 발표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다국적 IT기업에 M&A는 그 규모를 떠나 제한된 사업영역과 제품군을 넓히는 동시에 뒤처진 시장점유율을 일시에 끌어올리는 비즈니스의 정석 중 하나다. M&A는 부족한 부문을 보완하는 것뿐 아니라 1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분야에서 2위 주자의 추격 의지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결정타 역할도 한다. 다국적 IT기업은 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추진되는 M&A로 그들의 힘을 키운다.
◇필요하면 인수한다=최근 야후 인수 시도로 IT업계의 시선을 집중시킨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 2005년 이후 현재까지 3년여간 크고 작은 SW업체 30여곳을 인수했다. 2005년에는 VoIP 및 보안 솔루션업체가 주 인수대상이었으며 이듬해인 2006년에는 인터넷·모바일검색, 비디오게임, 가상화 관련 업체가 MS의 M&A리스트에 올랐다. 지난해에는 헬스정보시스템, 온라인·모바일광고 솔루션업체가 MS의 인수대상에 포함됐다.
오라클도 마찬가지다. 오라클은 지난 2005년 전사적자원관리(ERP) 및 인사관리 솔루션업체 피플소프트를 필두로 올해 들어 미들웨어전문업체 BEA시스템스에 이르기까지 37개 업체를 인수했다. 특히 최근 BEA 인수는 제품군 보완 측면보다는 경쟁사를 인수해 경쟁구도 형성 자체를 막으려는 배경 아래 이뤄진 것이기에 더 주목받았다.
SW업체 M&A는 비단 SW전문업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갈수록 나빠지는 IT HW 수익성 문제의 해답을 SW와 서비스에서 찾으려는 HW업체가 늘면서 앞서 HP의 EDS 인수발표와 유사한 M&A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는 올해 들어 오픈소스 데이터베이스업체 마이SQL을 10억달러에 인수했다. EMC는 스토리지 시스템 위주의 사업을 개편하기 위해 레가토시스템스·VM웨어(2003년), RSA시큐리티(2006년), 아이오메가(2008년) 등 데이터 백업 및 보안 관련 솔루션업체를 쉼없이 인수했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본다=제프 레이크스 MS 비즈니스디비전 사장은 올 초 기업용 검색솔루션업체 FAST 인수를 발표하면서 “(양사의 결합으로) 고객이 모든 필요를 한 번에 충족할 수 있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M&A로 폭넓은 서비스 기반을 갖춰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를 담은 목소리다.
이는 단순히 기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간혹 ‘시너지 효과가 작다’ ‘인수비용이 너무 높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 치밀한 전략에 따라 이뤄진 M&A인만큼 대부분 기업의 경쟁력을 배가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IBM은 지난 1995년 SW사업을 전담하는 SW그룹을 설립한 이후 2000년대 들어서만 50여개 SW업체를 인수했다. 이는 지난해 IBM이 거둔 수익의 40%를 SW가 차지하는 밑거름이 됐다. IBM은 M&A로 관련 분야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신규 시장 진입을 용이하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신규 시장 진입은 곧 신규 매출을 통한 또 하나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IBM이 지난 1995년 인수한 로터스는 당시 사용자가 200만명에 불과했으나 현재 전 세계적으로 1억3000만명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협업 SW로 성장했다. 이듬해 IBM이 인수한 티볼리는 당시 연매출 5000만달러에서 10년 만인 지난 2005년 10억달러 이상 매출을 올리는 대형 SW사업부문으로 거듭났다.
이들 모두 현재보다는 미래의 가치를 두고 내린 용단이 거둔 결실이었다. 지난 4월 한국을 찾은 제리 애시포드 선마이크로시스템스 아태지역 부사장은 오픈소스 DB업체 마이SQL 인수비용으로 10억달러가 너무 비싸지 않냐는 기자들의 지적에 “그만큼 큰 기회를 내다보고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M&A에 수반되는 비용 부담과 조직통합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얻는 ‘열매’. 국내 SW업체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이유다.
◆다국적기업의 M&A전략
다국적 IT기업의 인수합병(M&A) 소식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이들 M&A가 아무런 원칙 없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다국적 기업은 저마다 기업 상황에 맞는 원칙과 절차를 정해놓고 이에 입각해 M&A에 나선다.
SAP는 특정 부문 기술이나 솔루션 분야에서 뛰어난 경쟁력을 가진 기업을 주 인수대상으로 삼는다. 단순한 비즈니스 확장이 아니라 고객에게 더 높은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때에 인수를 고려한다. 유기적 성장을 위한 M&A를 원칙으로 삼는 것.
인수 과정 역시 철저히 고객에게 초점을 맞춰 진행한다. SAP는 피인수 기업이나 그 솔루션 자체를 부각시키기보다 인수대상을 자사에 자연스럽게 흡수해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 SW사업 비중을 높이고 있는 EMC는 △모든 M&A는 EMC 핵심사업을 기반으로 한다 △핵심사업을 보완할 수 있는 고속성장 분야에 집중한다는 두 가지 M&A 원칙을 정해놓았다.
EMC는 인수에만 그치지 않고 합병 후 철저한 경영관리로 시너지효과를 높인다. 이 모든 것은 ‘원(One) EMC’ 전략 아래 이뤄진다. 한국EMC 측은 “적극적인 M&A로 IT시장의 흐름을 미리 읽고, 한발 앞서 시장을 이끌어가는 기술 기반을 마련했다”고 본사의 M&A 활동을 소개했다.
IBM은 자사의 SW사업 발전속도에 맞춰 M&A 방향을 수정했다. IBM은 지난 2000년대 초반까지는 미들웨어 사업영역 확장을 위한 M&A에 주력했으나 최근 3∼4년은 솔루션 포트폴리오 강화와 함께 정보관리·서비스지향아키텍처(SOA)·보안을 비롯한 IT인프라관리 분야로 M&A의 방향타를 돌렸다. 이를 통해 고객의 가치 혁신을 지원하고 새로운 솔루션 영역에서 사업의 완성도를 높여간다는 것이 IBM의 M&A 구상이다.
이호준기자 new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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