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여전히 GDP 기준 경제규모 세계 5위의 부국이지만 많은 한국인의 눈에는 전성기가 지난 나라, 과거의 영화를 밑천으로 사는 나라쯤으로 만만히 보이기 일쑤다. 그러한 선입관을 유발한 주된 이유는 현재의 영국이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최상위권 브랜드를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생지며, 아무리 짧게 보아도 20세기 초반까지 100년 넘게 세계 최고의 제조업 국가로 당당히 군림하면서 인류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었다. 비록 영국의 제조업은 1950년대 이후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다가 1980년대 대처 정부 집권 이후 급격히 몰락해 버렸지만, 아직도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제조업 몰락을 안타까워하고 기술을 중시하는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다.
제조업을 대신해 영국 경제를 떠받쳐 온 것은 금융·서비스산업이었다. 또 중동·인도·동남아 등 전통적으로 영국과 교류가 많은 신흥시장에의 투자도 성과가 있다. 그렇다고 영국이 제조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항공산업과 제약 분야의 경쟁력은 세계 정상급이며 성장 속도도 빠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블레어 정부는 ‘지식경제’를 천명하고 산업에서 질적 변화를 추구했는데, 이는 비용저감을 경쟁력의 근원으로 하는 가치부가성(value-adding) 대량생산 산업에 종언을 고하고, 가치창출형 지식집약적 제조업 및 서비스업을 육성한다는 취지였다.
여러 명문대학을 포함하는 우수한 기초과학 기반과 강한 엔지니어링 전통이 맞물려, 다국적 기업 연구소들이 들어서고, 많은 기술컨설팅회사, 기술기반 벤처기업 등이 생겨났다. 물론 과학기술 최강국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할 수 있지만, 영국의 ‘지식경제’는 과학기술산업 정책 측면에서 그 나름대로 본궤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저히 극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첫째, 역설적이게도 대규모 제조산업이 없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효과와 국가 경제에의 기여도 면에서 뚜렷한 한계가 있다. 둘째, 대규모 제조업의 몰락은 공공·민간을 막론하고 연구개발 투자의 위축으로 이어졌으며, 그나마 이뤄지는 기술개발도 어디에 초점을 줘야 할지 방향성을 상실했다. 영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 지출(공공·민간 전체)은 고작 1.78%(2004년)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인 2.25%에도 미치지 못한다. 제조업 경쟁력을 지닌 일본(3.18%), 독일(2.5%), 미국(2.68%)과 비교하면 우려스러울 수준이다.
영국의 과학기술·산업정책 기조는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의 원조 국가답게 전통적으로 시장자율에 맡겨 왔고,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그러한 기조는 더욱 강조됐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영국의 과학기술정책 학계는 1950·60년대 일본, 1970·80년대 한국의 추격이 정부의 강한 산업 드라이브, 집중적인 기술개발 전략, 효율적인 국가혁신 체계에 힘입은 바 크다는 점을 강조해 왔고, 이는 (옛)통상산업부 등 정부 일각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기후변화가 글로벌 이슈로 자리 잡고 지속가능한 발전이 선진국들의 경제정책에서 중심에 놓이게 되자, 이것을 기회로 삼아 아직 양적 팽창에 집중하고 있는 후발 산업국가들과 차별화되는 신산업(emerging industry) 육성에 의욕을 갖게 됐다.
우리에게는 이른바 ‘선택과 집중 전략’이라든지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육성’이라는 슬로건이 매우 친숙하지만, 영국에서 기술개발에서 국가차원의 전략 수립, 전략적 자원 투입 그리고 미래산업 육성이라는 개념이 현실화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05년 논의가 시작됐고 2007년 출범한 기술전략위원회(TSB:Technology Strategy Board)는 환경과 지속가능성, 에너지, 건강, 교통, 창조적 산업, 고부가가치 서비스, (미래지향적)건축을 핵심 응용분야로 지정하고, 고부가가치 제조공정, 소재, 나노기술, 생명과학, 전자 및 광학시스템, 정보통신을 핵심 기술영역으로 지정했다. 또 TSB의 역할과 비전으로 신기술과 신산업의 지원과 육성, 혁신의 촉진, 연구개발 주체들 간의 네트워킹 등을 명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장경제가 가장 발달한 나라로서 우리가 앞으로 갈 길을 먼저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영국이, 오히려 일본·한국식 과학기술산업정책을 뒤늦게 도입한 형국이다. 다른 점이라면 한국에서 여전히 톱-다운 스타일로 정부의 영향력이 큰 반면에 영국 TSB는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철저히 민간위원들로 구성돼 있으며, 민·관 파트너십을 통해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며 연구개발 집행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이후 대처 정부는 영국의 많은 국가 연구소를 통폐합하거나 민영화했고, 이는 공공부문 연구개발의 붕괴를 초래했는데, 브라운 정부는 민간 파트너 기업들의 출자를 받아 새로운 형태의 공공연구소와 연구개발 네트워크로 에너지기술연구소(Energy Technologies Institute)를 연내 설립할 계획이다. 지식경제부가 출범했고, 정부출연연구소 등 공공연구 부문의 정비가 논의되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브라이튼(영국)=박상욱 박사. 영국 서섹스대 과학기술정책연구단위(SPRU)Sangook.Park@sussex.ac.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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