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9월 1일. 삼성전자는 본사를 수원으로 옮긴다. 1969년 1월 13일 창사 이래 삼성전자는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삼성빌딩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설립 초기 일본 산요 등 외국업체들과의 업무 추진과 대정부 로비 등을 원활히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자재조달의 애로, 생산기술의 미숙 등으로 제조라인의 부진이 심화됐다. 본사와 공장이 떨어져 있어 기동력마저 상실, 시장 개척에 어려움도 계속됐다. 이에 삼성전자는 본사 이전을 전격 단행한다. 삼성전자의 수원시대가 열리면서 본격적인 기반 다지기가 시작된 것이다.
◇독자 TV 제품 개발=창사 후 2, 3년이 흐르면서 점차 생산체제가 확립됐다. 어느 정도 기술도 축적됐다. 자신감이 붙은 삼성전자는 독자 모델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1972년 12월 삼성전자는 기술개발실을 신설한다. 연구개발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서다. 외국 선진기술 도입도 기술개발실 몫이었다. 삼성전자가 독자적인 흑백TV 모델을 만든 것은 1973년 1월. 일본 미쓰비시에서 기술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기술연구생이 TOSEC(일본 도쿄에 설립한 삼성전자의 현지법인)의 협력을 받아 12인치 진공관식 흑백TV를 개발한 것이다. 삼성전자가 흑백TV를 처음 만든 것은 삼성산요전기 시절인 1971년 1월 31일이니, 만 2년만에 독자모델 흑백TV를 생산해낸 셈이다.
석 달 후인 1973년 4월에는 19인치 트랜지스터식 흑백TV도 개발, ‘마하506’이라는 브랜드로 5월부터 국내 시장에 출하했다. 당시 막 조성된 안방극장 붐을 타고 마하506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냉기 제품도 자력 기반=신한일전기에서 임가공한 냉장고만 판매하던 삼성전자는 급증하는 내수에 대처하기 위해 자체생산에 나선다.
1973년 8월 삼성전자는 일본 산요전기로부터 냉기제품기술을 도입, 가전공장을 완공했다. 그 공장에서 냉장고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3월부터다.
첫 제품은 국내 최초로 ‘성에 없는(no frost 타입)’ 간랭식 냉장고였다. 선진국에선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던 타이머에 의한 서리 자동제거방식과 냉기순환 냉각방식을 채택한 이 냉장고 개발을 통해 국내 냉장 기술은 단번에 선진국 수준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에어컨의 개발·생산에도 박차를 가한다. 냉장고 생산라인 옆에 연간 3000대를 양산할 수 있는 에어컨 생산라인을 신설, 첫 제품으로 윈도 타입의 에어컨을 만들어 냈다. 그때가 1974년 5월이다.
◇독자생산 라인업의 확대=8트랙 재생이 가능한 콤팩트 스테레오 개발에 성공, 음향기기 사업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 역시 같은 해인 1974년이다. 이어 삼성전자는 녹음 전용 카세트와 AM/FM 라디오 겸용 카세트를 생산, 국내 시판과 함께 미국의 일렉트라 라디오사로 수출까지 했다.
당시는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세탁기 수요가 급증하던 때다. 이에 발맞춰 삼성전자는 1973년 세탁기의 독자 개발에 착수한다. 1년여의 시행착오 끝에 1974년 12월 용량 2㎏ 짜리 와류식 세탁기를 생산해냈다. 일본 산요전기가 1969년 개발한 펄세이터(pulsator) 방식의 2조 수동형을 기본 모델로 해서다.
이 밖에 삼성전자는 1972년 4월 자체 기술로 개발한 모터를 내장한 선풍기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에는 전기 스토브를, 이듬해 12월에는 전기밥솥도 척척 만들어 냈다.
일본 카시오와의 기술제휴로 1972년 8월 경남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에 전탁 생산라인을 건설, 그해 12월부터 탁상용 전자계산기를 생산했다. 그후 부품 국산화와 더불어 자체 모델 개발에 착수해 1974년 4월에는 국내 최초로 자체 전자계산기를 개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종합가전 메이커로=1973년 12월에는 냉장고를 연간 3만대까지 생산할 수 있는 가전 생산라인을 완공한다. 이어 기존 제품의 시설능력 확충과 세탁기, 쇼케이스 등 신규 품목의 생산을 위해 1974년 5월 가전 생산라인 증축공사를 시작, 8월에 완공해 가전제품을 종합 생산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이즈음 삼성전자는 효율적인 경영과 생산체제를 갖추기 위해 공장을 한곳에 집결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가천 삼성전관 사업장 내에 있던 전탁 생산라인을 수원전자단지로 이전한다. 1974년 8월의 일이다.
◆전자부품·소재 생산 주력 일부 완제품 생산에 치중
1974년까지는 삼성전자가 수직계열화 시스템 정착에 전력투구, 전자 분야에서의 성장기반을 닦던 시기였다. 출범 후 1974년까지 5년간 삼성전자는 삼성전자공업·삼성산요전기·삼성NEC·삼성일렉트릭스·삼성산요파츠·삼성코닝 등 6개사를 설립하고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1969년 금성(현 LG전자)에 10년 뒤져 출발한 삼성전자가 금성과 대등한 힘을 축적하게 되는 시기가 1970년대 초반이다. 금성이 독일과 일본에서 자본 및 기술을 들여와 완제품 생산에 주력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삼성전자는 주로 일본과 미국에서 기술을 들여와 완제품 생산에 나섰다. 또 삼성전자는 전자부품과 소재 생산에 주력, 오로지 TV·냉장고 등 일부 품목의 생산에만 치중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삼성의 투자가 집중됐던 분야가 바로 브라운관·실리콘트랜지스터·튜너·고압트랜스 등의 부품과 브라운관용 유리벌브 등의 소재였다. 삼성은 이 같은 전략을 완제품에서 부품·소재에 이르는 ‘수직계열화 시스템’이라 부르며 박차를 가했다.
삼성코닝은 삼성NEC의 흑백브라운관 생산에 대한 수직계열화 시스템 구축의 일환으로 1973년 6월 삼성전자와 미국 코닝글라스웍스의 자회사인 코닝인터내셔널과의 50 대 50으로 합작 설립됐다.
한국반도체는 모토로라 등으로부터 마이크로웨이브 등을 수입하던 오퍼상 켐코가 1974년 1월 미국 ICII사와 50 대 50으로 합작 설립한 반도체 웨이퍼 가공전문업체였다. 그러나 설립과 동시에 경영난으로 휘청거리자 그해 12월 당시 이건희 부회장이 그룹 차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인자금으로 한국반도체의 지분 50%를 인수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이 태동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