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22)`메모 콜`프로젝트

[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22)`메모 콜`프로젝트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국내 첫 1호 도입 컴퓨터에서 1호 국산 컴퓨터까지

 컴퓨터 분야의 국산화는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국산 하드웨어 업체와 소프트웨어 개발 용역업체가 연이어 국내 시장에 진출하면서 ‘신기한 물건’ 컴퓨터를 경험했고 이를 우리 것으로 만들자는 노력을 시작한 때가 대략 지금부터 35년 전이다. ‘메모 콜(memo call)’ 프로젝트가 그 주인공이다. 메모 콜 프로젝트는 청와대와 전국 주요 기관, 정보 기관끼리 직통 전화를 설치하는 일종의 극비 계발 계획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국산 1호 컴퓨터 ‘세종1호’가 탄생했다. 1967년 경제기획원 통계국에서 국내 첫 컴퓨터 ‘IBM1401’을 도입해 가동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물론 국산화에 대한 노력은 1960년대 초반 한양대 교수였던 이만영씨(현 한양대 명예교수)의 진공관식 아날로그 계산기 제작과 1970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영문 라인 프린터 한글화 등이 있었다. 실제로 1964년 5월 15일자 한양대학보는 이만영을 ‘한국 최초의 전자계산기 완성’의 주인공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만영의 전자관식 계산기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이만영의 전자계산기는 당시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던 스페리랜드의 ‘유니백’ 시리즈, IBM ‘70xx’ 시리즈 등과 달리 장래성과 실용성이 불투명한 아날로그 컴퓨터였다. 컴퓨터라기보다는 고차원 수학 문제를 푸는 일종의 계산기 정도였던 셈이다.

 세종1호에 앞서 시도된 또 다른 국산화 작업은 1970년 성기수 KIST 전산실장이 주도한 컴퓨터 한글화였다. 성기수 실장의 한글화는 라인 프린터에 걸린 영자 체인을 한글 체인으로 교체해 한글을 출력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영문 알파벳에 대응하는 한글의 초·중·종성 자모를 컴퓨터 명령으로 모아 출력하는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글화는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미개척 분야로 당시로서 매우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1973년 2월 메모 콜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한 세종1호는 당시 미니급 컴퓨터가 지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능을 지원하면서 컴퓨터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했다. 세종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01’을 개량해서 만든 컴퓨터로 알려져 있다.

 세종1호가 더 흥미를 끄는 배경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세종1호가 정치적 목적으로 개발됐고 이때부터 컴퓨터 기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해석이다. 메모 콜이라는 암호명으로 시작한 세종1호 개발은 1972년 4월 당시 청와대 통신기술처장이던 한 인사가 KIST 측에 기술적 검토와 제품 개발 가능성을 타진해 오면서 비롯됐다. ‘처음 쓰는 한국컴퓨터(서현진 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청와대의 주요 기관끼리 전화 통화 내용에 대해 미국 등 외국 정보기관, 기타 외부에서 도청 가능성을 차단하고, 주요 요인과 신속하게 통화할 수 있으며 통화 도중이라도 언제나 상위권 통화자가 통신 상태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핫라인용 사설전자교환기(PABX) 개발이 가능합니까? 1973년 3월 이내에 개발이 가능하면 연구개발비로 6000만원을 제공하겠소.”

 청와대 측의 이런 교환기 제작 검토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의 극비 남북 교환 방문에 이은 7·4 남북공동성명과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등 긴박했던 정치적 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즉 청와대와 중앙정보부를 잇는 초특급 핫라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KIST 측은 2개월 동안의 연구 조사 끝에 청와대가 요구해온 PABX가 미국·소련 등 극히 일부 정보 기관에서 사용하는 시분할식 특수목적용 교환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 컴퓨터 업계를 휩쓸던 미국 디지털이퀴프먼트(DEC)의 ‘PDP-11’ 시리즈나 DG의 ‘노바01’ 시리즈 등 미니급 컴퓨터를 PABX 시스템 제어용으로 활용하면 청와대가 요구한 PABX의 사양을 못 맞출 것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개발 시한이 1973년 3월까지였으므로 KIST 측은 DEC 제품을 포기하고 대신에 당시 미국 DG가 일본에서 현지 생산하는 노바01을 도입하기로 했다. KIST가 외무부에 협조를 구하는 형식을 취해 노바01 3대가 주문 1주일 만에 연구실에 설치됐다. 이를 모태로 세종 1호가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이다.

 사실 요즘 전자식 교환시스템 성능에 비교한다면 세종1호는 기능 면에서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전 분야에서 기술적 한계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최첨단 제품이었다. 게다가 비록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한 삼성반도체통신 출범에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는 등 산업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삼성반도체통신은 이를 모태로 개량 모델을 내놓으면서 1986년 교환기 4사에 의한 국산 전전자 교환기 ‘TDX-1’ 개발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또 1980년대 중후반 삼성반도체통신이 국내에서 처음 독자 모델로 개발한 ‘SSM’ 시리즈 슈퍼 마이크로 컴퓨터의 기술적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국내 첫 외산 컴퓨터는

 국산 1호 컴퓨터는 세종1호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국내에 처음 도입해 사용한 컴퓨터와 관련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컴퓨터는 1967년 4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 통계를 위해 도입했던 IBM의 ‘IBM1401’이다. 그런데 왜 공식이라는 단서가 필요할까.

 정식 기록으로 인정받은 것은 ‘IBM1401’이지만 또 다른 ‘비공식’ 기록을 가진 제품이 바로 후지쯔 ‘파콤222(FACOM 222)’ 기종이다. 파콤222는 불과 1개월 정도 앞서 국내에 들어왔다. KCC정보통신 창업자인 이주용 회장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이 회장은 “후지쯔와 담판이 성공해 대한민국 1호 컴퓨터는 파콤222가 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IBM1401을 한국 최초의 컴퓨터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파콤222가 그것보다 한 달 보름여 일찍 들어왔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IBM1401’이 공식적으로 국내에 처음 도입된 컴퓨터로 남게 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당시 재무부 장관 소관이던 수입 컴퓨터 통관 허가가 ‘IBM1401’은 1967년 4월 25일, ‘파콤222’는 그보다 17일 뒤인 5월 12일에 각각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호 논쟁 이상으로 이들 두 기종 모두 국내 컴퓨터 산업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존재다. 이들 두 기종이 국내에서 가동되면서 바로 잠자던 우리의 눈과 귀, 머리를 깨워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국산화, 국내 컴퓨터 산업을 꽃피우는 큰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강병준기자 bj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