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씨앗을 심은 연구기관이다. ETRI가 개발한 시분할 전전자교환기(TDX)는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198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메모리 반도체 32K 롬(ROM)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전자산업의 꽃이라 불리는 컴퓨터를 국산화한 것도 ETRI가 이룬 쾌거다. ETRI의 모태는 1976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KCRI)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등장=1962년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우리 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경공업 중심으로 수출 사업을 다지고 산업 기반 시설을 확충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증대를 목표로 세운 3차 경제개발 계획은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시련을 겪는다.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고 인플레이션 심화, 임금 상승이라는 3중고에 새로운 타개책이 필요했다. 기술 집약형 산업으로의 전환이 어느때보다 시급하다는 동의를 얻게 되는 계기다.
정부는 60년대 후반부터 과학기술 전문 연구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1966년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돼 과학기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부는 다양하고 세분화한 전문 연구기관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KIST 부설로 분야별 전문 연구소를 설치하고 기술 개발을 주도하게 했다. 출연연구소는 수출증대와 기술국산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성원에 힘입어 1966년 2월 KIST를 필두로 1979년까지 16개가 설립돼 각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76년 12월 KIST의 부소장이던 정만영을 초대소장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소(KCRI)가 설립됐다. KCRI는 통신시설 확충을 위해 전자교환기의 국내 도입을 추진한다. KCRI는 1977년 소속이 체신부로 바뀌면서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로 이름을 바꾼다. KTRI는 1981년에 상공부 산하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와의 통합을 거쳐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로 명칭이 바뀌며 교환기 국산화 등 통신분야 연구의 산실 역할을 했다.
같은 시기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도 문을 열었다. KIET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기인이 되어 설립될 만큼 정부가 가장 많은 공을 들였으며 연구소 규모도 가장 컸다. 정부출연 41억원, 민간 10억원, IBRD 차관 1100만달러 등 모두 106억원의 거금을 투입했다. KIET는 16비트 및 32비트 초소형 컴퓨터에 대한 유닉스 운용체계 이식 기술, 8비트 및 16비트 초소형 컴퓨터 개발 등에 착수했다. 각종 반도체의 설계와 제조공정 및 양산기술의 국산화를 추진하는 것도 이 연구소의 몫이었다.
◇연구기관 통폐합=민간업체의 기술 개발이 미미하던 1960∼1980년대 이공계 정부출연연구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70년대 이후 전자·반도체·통신 분야 기술 개발은 대부분 출연연구기관의 몫이었다. 하지만 급격히 늘어난 연구소는 취약한 연구 기반과 지역적 분산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기관을 통폐합해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했다.
이들 15개 연구소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내세운 ‘사회전반의 개혁’이라는 명분에 따라 8개로 통폐합된 것은 1980년 12월이었다. 자율적인 통합 논의가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전에 연구기관은 정치 상황의 변화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정부 주도의 통폐합 작업은 빠르게 추진됐다. 1980년 9월 과학기술처의 연구기관 통폐합 방안이 마련됐고, 11월 ‘연구개발체제 정비와 운영개선 방안’이 발표됐다. 핵심 내용은 연구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각 부처에서 관리하던 기존 16개 연구소를 유사기관끼리 묶어 8개 연구소로 축소하고, 이를 과학기술처에서 통합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1984년 12월 29일, 8개 연구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통폐합이 성사된다.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장관협의회는 KTRI와 KIET의 전격 통합을 의결했다. 그 결과 1985년 1월 발족한 연구소가 바로 현재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다.
◆최문기 ETRI원장 인터뷰
-설립 이후 ETRI의 위상은 어떻게 변했나.
▲ETRI는 1976년 설립 이래 짧은 시간 동안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며 대한민국 IT 발전사를 새롭게 써왔다.
ETRI 설립 이후 30여년간 연구개발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10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5100여억원의 기술료 수입을 거뒀고, 국제 특허 출원 3800여건을 포함해 2만1000여건의 특허를 갖고 있다. 최근 10년간 SCI 등재 논문이 1000여편에 이르고, 100여명의 연구원이 국제 표준화기구 의장단에 진출해 국제표준화를 주도하고 있다.
-ETRI의 주요 연구 성과는.
▲1986년 디지털 방식의 전전자교환기(TDX)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고, 1988년 4메가 DRAM 개발을 시작으로 국내 반도체 산업을 세계 1위로 자리 매김하는 초석을 세웠다. ‘세계 최초’의 수식어도 많다. CDMA 방식 이동통신, 초고속 휴대인터넷 와이브로(WiBro), 지상파DMB 기술은 ETRI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기술이다. 지난해에는 한발 더 나아가 3세대 와이브로를 뛰어넘는 4세대 무선전송 기술인 ‘놀라(NoLA, 저속 이동 사용자에게 3.6 , 고속 사용자에게 최대 100Mbps의 전송속도를 지원하는 무선전송시스템)’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3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본다면.
▲당시에는 연구인력이 100명 남짓이었지만 지금은 2000명이 넘는 연구원이 ETRI를 이끌고 있다. 연구분야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ETRI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융·복합화를 준비하고 있다. △통신방송융합연구부문 △융합기술연구부문 △SW콘텐츠연구부문 △융합부품·소재연구부문의 4대 부문으로 나누어 원천기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차세대태양광연구본부’를 신설해 IT산업의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고 있다.
-앞으로 ETRI가 나갈 방향은.
▲최근 IT산업의 트렌드는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서비스·네트워크·단말기가 융·복합화하는 디지털 컨버전스라고 할 수 있다. 통신과 방송, 유무선의 융합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ETRI는 컨버전스화에 발맞춰 IT와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ET)을 접목할 것이다. IT 융합부품 및 소자분야도 차세대 먹거리로 ETRI가 집중 연구해야 할 미래의 개척지라고 생각된다. 조선산업, 자동차산업, 섬유산업 등과의 연계도 모색하겠다.
앞으로 ETRI는 메이저우와 베이징에 R&D 거점을 마련하는 등 글로벌 마케팅전략을 추진해 세계적인 연구원으로 자리 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