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는 스파이더맨을 앞세운 마블 코믹스가 더 유명하지만 사실 미국 코믹스를 처음으로 산업화한 회사는 DC였다. DC가 1940년 코믹스 산업의 시작은 연 것과는 달리 마블은 60년대 ‘스파이더맨’과 ‘엑스맨’을 내놓으면서야 비로소 DC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다.
슈퍼맨을 비롯, DC가 가진 슈퍼 히어로 종류는 샐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배트맨’은 그중에서도 으뜸 캐릭터다. 배트맨이 DC의 정체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표 영웅이기 때문이다.
음울하고 상처받은 철학적 존재. 이것이 바로 DC가 생각하는 슈퍼 히어로다. 배트맨을 주제로 한 6편의 영화 중에서도 지난 2005년 만들어진 ‘배트맨 비긴스’는 DC의 이런 철학을 완벽하게 투영해낸 원전 중의 원전으로 꼽힌다. 기존 작품들이 아동물과 성인물 사이에서 방황하다 진짜 배트맨을 그리는 데 실패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하고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과잉 속 결핍된 존재’라는 박쥐 인간의 고유의 색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달 7일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드디어 돌아온다. 3년에 찾아오는 박쥐 인간의 이름은 ‘배트맨: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다. 이 영화는 영웅의 기원을 그린 전편과 그 맥이 닿아 있다. 배트 슈트를 입고 악당을 물리치는 모습도 그렇고 악당과 5초 안에 시속 100㎞를 돌파하는 배트모빌도 여전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고개를 돌릴 수 있는 배트맨 정도? 전편에서 웨인의 불만은 박쥐 옷을 입으면 뒤에서 공격하는 적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풍겨내는 포스는 전편과는 확연히 다르다. 전편이 광활한 대지 위에 홀로 남은 고독한 영웅을 그렸다면 ‘다크 나이트’는 완벽히 구체화된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담시에 만연했던 범죄와 부정 부패를 일소하기 시작한 배트맨. 악이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더욱 강력한 적들이 모여든다. 이 중 가장 센 놈은 역시 조커(히스 레저)다. 악당의 전형인 조커는 파괴를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웨인에게 ‘네가 있어야 내가 완벽해져’라고 외치는 그는 배트맨을 죽이기 위해 고담시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한다.
‘다크 나이트’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말 재미있는 영화다. 지난주 이 영화는 미국 박스 오피스상 최고 오프닝 기록(1억8000만달러)을 세웠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재미 측면에서는 정말 완벽하다. 관객들은 회색 도시에서 조커와 배트맨이 팽팽하게 맞서는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특히 아이맥스 카메라로 잡아낸 수직 도시 고담시와 오토바이 배트포트가 이를 휘젖고 다니는 속도감은 가히 환상적이다. 시카고의 월스트리트라 불리는 라 살라가 은행 지구 위에서 12m 대형 트레일러가 한방에 날아가는 장면과 후반부 건물 안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SWAT팀이 투입되는 장면이 압권이다. 전편에 이어 이번에도 감독을 맡은 놀란은 아이맥스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 마치 화면이 수직으로 튀어오르는 듯한 마술적 영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화면 뒤에 숨겨진 이야기 플롯은 물음표다. 지난 1월 요절한 히스 레저의 신들린 연기는 높이 살 만하지만, 또 다른 악당 투페이스로 변하는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나 덴트의 연인 레이첼(매기 질렌홀)의 모습은 전체 흐름을 끊어놓는다. 배트맨의 매력이 흑과 백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지만 이 두 인물의 뜬금없는 분노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한정훈기자 exis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