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정은(26)씨는 얼마 전 아이핀을 발급받아 한 포털 사이트에 가입했다. 최근 잇따른 해킹으로 혹시나 인터넷 상에서 주민등록번호가 노출될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씨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해당 사이트에서 영화를 보려고 결제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기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객센터에 문의를 했더니 “전자상거래법상 고객님의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기록을 5년간 보존해야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핀만 쓰면 주민등록번호 없이도 다양한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이씨는 “황당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모 포털사이트 동영상 서비스 팀장은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등급 심의를 통과한 영상물을 엔터테인먼트 게시판에 올렸다가 검찰로부터 음란물 유포죄로 기소됐다.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 청소년이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성인인증까지 했지만 검찰은 “자율기구인 영등위의 등급은 절대적이지 않고, 검찰 자체적으로 음란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법원도 검찰의 손을 들어줘 ‘정통망법’ 위반을 이유로 벌금형 유죄 판결을 내렸다. 지난 6월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를 두고 사업자들은 “국가가 인정한 공신력있는 기관을 믿어도 범법자가 되는 마당에 어떤 예상치 못한 규제가 있을지 몰라 불안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만들어 놓은 각종 인터넷 정책 및 규제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 우리나라 인터넷 규제는 여러 영역에서 걸쳐있기 때문에 숨어있는 규제 간 엇박자가 의외로 많다. 규제간 모순은 심각한 혼선을 낳는다. 어느 장단에 춤춰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사업자들의 부담도 가중된다. 규제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질 뿐만아니라 효과가 크게 반감되는 부작용도 낳는다.
대표적인 것이 아이핀 제도다. 방송통신위원회가 개인정보보호 강화를 위해 포털 사업자에게 주민등록 대체수단으로 도입한 아이핀은 개인정보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일종의 ‘사이버 면허증’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핀은 기존 법제도와의 충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반쪽짜리 정책이라는 평가다. 카드사나 이동통신사 등 온라인 금융거래에서는 모두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이핀이 실효성이 떨어진다.
그러다보니 시범서비스 도입 2년이 다 되가지만 국내 18개 사이트의 평균 아이핀 인증비율은 7.3%에 그칠 정도로 저조하다(6월 국회예산정책처 제출 자료). 인터넷 사업자들은 “아이핀 도입을 위해서는 전자상거래법, 인터넷 실명제 등 각종 규정을 다바꿔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사업자만 이중적인 시스템 운영 부담만 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현재 전자상거래법상 사업자는 영수증 발급을 위해 이용자의 주민번호와 성명을 보관·저장하고, 청약철회, 대금결제 등에 관한 기록은 5년동안 보존을 의무화하고 있다.
지난 22일 방통위와 행안부가 발표한 ‘인터넷 정보보호 종합 대책’에도 이 같은 소지가 다분하다. 개인정보 수집을 최소화 한다고 했지만 제한적 본인확인제가 강화되면 실명제에 따른 기본적인 개인 정보수집은 불가피하다. 또 명의도용이라는 역기능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개인정보 수집이 강화돼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올 초 개정된 통신비밀보호법도 마찬가지다. 경찰, 검찰, 법원 등이 요구할 경우 인터넷 사업자를 포함한 전기통신사업자는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통신 사실에는 접속기록, 시간, 위치, 읽은 게시물, 방문 사이트 리스트 등 다양한 개인정보가 포함된다. 인터넷 사업자들은 개인정보를 갖고 있으면 ‘과다 정보 수집’이라는 제재를 받고, 갖고 있지 않으면 수사기관의 협조를 이행할 수 없게돼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이은우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기업의 개인정보 수집을 법적·제도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포털 뉴스에 대한 규제도 모순이기는 마찬가지다. 신문법에 따르면 포털은 언론사로부터 뉴스를 제공받기 때문에 오보가 발생했고 이를 인지했다 하더라도 수정할 권리가 없다. 해당 언론사가 수정해달라는 지시를 내려야만 그제서야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경우 대부분 “포털이 잘못된 뉴스를 수정·삭제하지 않고 방치한다”는 비난이 떨어진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일부에서는 포털을 언론으로 규정해야 한다며 신문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또 다른 모순이 생겨나기는 마찬가지다.
청소년유해매체물 규정도 사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규제 기관이 청소년보호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 등 10개에 가깝고 관련 법도 5∼6개를 적용받다 보니 어려움이 적지 않다. 청소년 보호는 엄격하게 해야하지만 포괄고시, 지정고시, 자율고시 등 적용 고시규정이 지나치게 방대하고 각 기관간 심의기준과 기간이 달라 이행에 난점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에 따라 규제간 충돌이 더욱 잦아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경쟁적으로 나오고 있는 의원입법 발의는 이런 불일치를 가중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권헌영 광운대 법대 교수는 “규제 법안을 만들 때 기존 법률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며 “규제도 예측가능성과 일관성을 높이는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포털 모니터링 담당에게 물어보다
“음란물 유포나 명예훼손 같은 게시글에 대해서는 유통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이외에는 할 말이 없네요.”
최근 전화와 메신저, 대면 인터뷰를 통해 만난 포털 3사의 모니터링 담당은 하나같이 최근 정부 규제와 네티즌의 인터넷 이용 문화 사이에서 첨예한 간극을 느끼고 있었다. “직접 부딪히는 현장에서는 게시물을 어떻게 봐야할지 고민되는 경우가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며 “그러나 정부 정책과 기준이 들쭉날쭉하고 일률적이지 않아 판단에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한다.
A사의 정씨는 “최근 한 네티즌이 문제의 소지가 있는 글의 주소가 있는 링크를 올려놨는데, 경찰에서 그 네티즌의 개인정보를 요구해 황당했다”는 경험담을 털어놨다. 과거의 경험에 비춰 문제가 될 소지가 없고, 상식적으로 과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포털에 방조 책임을 떠넘길까 전전긍긍했다고 한다.(경찰의 지시에 따랐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B사 한씨도 ‘불법적인 의약품 정보를 차단하라’는 지침에 따라 모니터링을 하던 중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해당 부처에 문의했지만 “모호하니 알아서 조치하라”는 식의 대답을 들었다. 그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니만큼 처리하고 나서 문제가 되거나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까 고민이 많은데, 그런 부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고 하소연 했다.
게다가 최근 인터넷 규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다 보니 모니터링 기준을 손질해야 하는 빈도도 높아졌다. 박모씨가 근무하는 C사는 일주일에 30번 정도 모니터링 기준을 업그레이드 한다. 각종 사안에 대해 정부의 규제 정책과 조치 사례를 반영하다보면 그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한씨 역시 “딱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최근 이것저것 반영할 조치들이 많아 수시로 기준을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부가 단순히 포털이 책임을 다해야한다는 식의 모호한 형태가 아니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포털에 책임을 물을수록 포털이 해석할 여지가 많아지기 때문에 부담스럽고, 때로는 서비스 제공자의 영역을 넘는 상황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지난 27일 포털 6사가 게시물 처리방침에 대한 정보 공유와 핫라인 구성 등을 위해 정책협의체를 만들기로 합의한 것도 이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하나다.
그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이용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정책이 오락가락 하다보니 네티즌과의 마찰만 커지는 것 같다”며 “사전에 큰 틀이 논의되고 기업에 어떻게 하라는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주어진다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기업 규제, 구글은 웃는다
“결국 구글이나 마이스페이스 같은 외국 기업에 몰려가겠죠. 처음 유튜브가 들어왔을 때 저작권 처리 방식에 대해 수 차례 지적이 나왔지만 지금도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적하는 기관은 한 곳도 없네요.”
한 중소 인터넷 서비스업체 대표는 최근 드러난 각종 규제가 국내 기업을 되레 역차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 기업은 규제 중심에서 비껴나 있으면서 반사이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규제 회피의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강화된 규제를 외국 사이트에 적용할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방통위의 한 관계자는 “정통망법을 외국계 기업에 적용할 수 있는지는 한국에 법인 형태로 들어와 있는지와 서버가 국내에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즉 현지법인이 아닌 단순 지사나 사무소 역할만 하고, 서버가 외국에 있다면 국내 법망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네이버, 다음이 정부 규제로 홍역을 치르는 동안 구글이나 마이스페이스는 신규 서비스 개발을 고민하면서 느긋하게 이를 즐기는 셈이다.
더욱이 실제 국내 기업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자 ‘표현의 자유가 막힌’ 네티즌들이 해외에 서버를 둔 서비스로 눈을 돌리고 있다. 다음의 카페에 올라온 광고주 압박 게시글이 문제가 되자 네티즌들은 구글의 게시판으로 옮겨갔다. 얼마 전 서울대생들이 ‘위키피디아’에 정치인 데이터베이스(DB) 시험 사이트를 열면서 외국의 무료 서버를 구한 것도 외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다.
또 강력한 규제에 코드를 맞추다보면 국내 기업의 글로벌 전략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UCC 포털인 판도라TV는 지난 6월 한류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는 ‘드림콘서트’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했다. 온라인 상에서 실시간으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8000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회원가입을 하고 댓글을 달며 적극적으로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앞으로 제한적 본인확인제가 확대 실시되면 중국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이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쇼핑몰도 마찬가지. 국내 네티즌이 아마존에서 책을 사기 위해서는 아이디, 패스워드, 신용카드 번호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해외 네티즌이 국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려면 언어 이전에 가입 단계에서부터 장벽에 부딪혀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정김경숙 구글 홍보이사는 “우리는 해당 국가의 실정법을 지킨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다음에 대한 조치가 동일하게 취해진다면 우리는 계속 문제제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법을 따르겠지만 할 말은 하겠다는 얘기다. 실제로 구글은 광고주 압박 게시물 삭제 요구에 대해 ‘삭제 불가’ 방침을 발표했다. 최근 한국 서비스를 시작한 마이스페이스도 “국내 실정법을 최대한 존중하겠지만 전 세계 서비스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방침과 벗어나는 부분이 있다면 본사와 협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다. “안타깝고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많지만 지금 상황에선 숨죽일 수밖에 없다”는 국내 중소 포털의 홍보이사의 발언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수운기자 p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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