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29) 컴퓨터의 등장

　1970년대 전자산업계의 주된 영역은 흑백TV·냉장고·선풍기·전자레인지 등 정부가 수출을 주도한 가전 분야였다. 당시 컴퓨터는 이제 막 기업들이 신규로 진출하는 수준이었다. 1967년 국내에 컴퓨터가 처음 도입된 이래 10년이 지났지만 단일 산업 분야를 이룰 만큼 규모도 크지 않았다. 컴퓨터는 일부 대기업과 공공기관 전산화용으로 보급된 게 전부였으며 수량도 몇 백대를 넘지 못했다.

　컴퓨터 도입이 급증세를 띤 시점은 대략 1976년 전후다. 그것도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주도로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대기업은 기술과 노하우가 전무했던데다 시장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진출을 꺼렸다. 컴퓨터가 산업화의 기치를 올린 데는 동양전산기술(OCE) 역할이 컸다.

　OCE가 국산 미니 컴퓨터 ‘오리콤 540’을 선보이면서 국내에서도 컴퓨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오리콤 540은 세계 컴퓨터 시장을 주도하던 미국 디지털이퀴프먼트(DEC)가 당시에 IBM 다음으로 많이 팔았던 ‘PDP 11’을 모델로 개발한 제품이었다. DEC의 CPU와 보조 기억장치, 브라운관(CRT) 터미널 등 부품을 각각 따로 구입해 완성품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국내 생산에 성공했다.

　OCE 제품이 나오면서 대기업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대표적인 산업용 전자기기로 컴퓨터를 바라보았고 제품 공급처를 확보하거나 직접 생산하는 방법을 찾았다. 1976년을 전후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대기업은 삼성전자·금성사·금성전기·동양정밀·벽산·쌍용양회·두산 등이었다. 이들은 미국·일본 컴퓨터 기업과 손잡고 국내에서 합작 생산하는 쪽과 외국 기업의 대리점 사업을 통해 우선 노하우부터 축적하는 쪽 두 가지 형태로 진출을 검토했다.

　그러나 이때 시작한 컴퓨터 사업이 지금과 같은 종합 정보통신사업 형태로 발전한 곳은 금성사와 삼성전자 정도였다. 나머지 기업은 모두 도산했거나 사업 담당 부서가 다른 기업으로 넘어갔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던 ‘PDP 11’을 공급하던 OCE는 판매난으로 결국 두산그룹으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금호실업은 컴퓨터코리아에 사업 자체를 넘겼고 OPC는 동양시스템산업이라는 계열사를 통해 투자 의욕을 보였지만 그룹 전체가 부도를 내면서 운명을 달리했다. 금성전기와 금성통신은 금성사로 조직을 이관했다.

　그나마 컴퓨터 산업의 계보를 이은 업체는 삼성전자와 금성사였다. 두 업체 가운데 컴퓨터 사업을 먼저 시작한 곳은 삼성전자였다. 삼성은 1976년 HP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면서 ‘선공’을 날렸다. 삼성은 당시 가전 분야에서는 LG에 선두 자리를 내줬지만 컴퓨터만큼은 앞서겠다는 전략에서 상당한 공을 들였다. 1975년 컴퓨터 분야 진출을 결정하고 눈여겨본 기업이 HP였다. 삼성은 일본 요코가와HP(YHP)의 중개로 1976년 8월 HP와 컴퓨터와 계측기 분야 국내 독점 공급 계약을 맺고 전자사업 본부 내에 컴퓨터 시스템 사업부를 신설했다.

　삼성 선공에 대한 금성사의 응수는 1978년께였다. 1978년 금성사는 미국 하니웰과 독점 총판 계약을 맺고 ‘하니웰 레블6’ 기종을 국내에 공급하면서 출사표를 던졌다. 두 회사 모두 미국산 컴퓨터 기종을 들여와 총판 영업 형태로 컴퓨터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삼성과 금성의 첫 컴퓨터 전쟁은 예상 외로 싱겁게 끝났다. 사실 금성사보다 2년 먼저 사업을 시작한 삼성전자의 승리는 이미 예고된 바나 다름없었다. 1976년부터 1979년 말까지 삼성전자가 국내에 공급한 미니컴퓨터 ‘HP 3000’은 무려 50대가 넘었다. 반면에 금성사는 사업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긴 하지만 이 기간에 공급한 기종은 럭키화학에 공급한 ‘하니웰 레블6’ 단 한 대였다.

　당시 전자산업을 호령하던 두 회사가 컴퓨터 산업에 불씨를 지핀 이후 국산화도 탄력이 붙었다. ‘처음 쓰는 한국 컴퓨터사(서현진 저, 전자신문)’에서는 컴퓨터 국산화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진행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째는 유수 컴퓨터업체에서 보드 핵심 부품을 들여와 미니 컴퓨터를 조립 생산하는 방법이었다. 가령 DEC에서 공급받은 핵심 부품에 국내에서 생산한 부품을 결합해 국산화율을 높이는 식이었다. 두 번째는 당시 미국에서 화제가 된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들여와 8비트 마이컴 혹은 이를 내장한 주변기기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마이컴 생산은 1970년대 후반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ST), 1980년대 초 삼보컴퓨터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기반한 PC 산업을 일구는 기초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활발했던 분야로 중대형 컴퓨터용 CRT 단말기를 한글화하는 작업이었다. 한글 CRT 단말기는 삼성전자와 금성사의 국산화 경쟁으로 이어졌고 컴퓨터 분야도 중·대형 위주의 산업용에서 개인용(퍼스널 컴퓨터)으로 시장이 넓어지면서 지금의 IT산업 강국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인터뷰

　국내 컴퓨터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회장(76)이다. 이 회장은 초기 컴퓨터 기술의 토대를 닦았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ST)에서 컴퓨터 국산화를 주도했다. 지금은 퇴계학연구원장으로 컴퓨터 업계를 떠나 후학 양성과 교육 사업에 전념하고 있으나 아직도 그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70년대 우리 전자 공업은 연간 40∼50%씩 성장하고 있었어. 이런 추세라면 1980년대에는 영국을 앞질러 세계 5위도 넘볼 수 있을 정도였지. 당시 전자공업이 선진화하려면 컴퓨터와 반도체 국산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어. 컴퓨터 국산화 없이는 빛 좋은 개살구라고 본 거야. 산업계가 대부분 기술을 외국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KIST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거지.”

　이 회장은 1970년 미국에서 귀국해 1976년 KIST 컴퓨터 국산화 연구실장을 지냈다. 이어 1978년부터 부소장을 역임해 국내 전자산업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KIST에서 연구실장을 맡아 국산화를 주도했고 처음으로 개발한 국산 마이크로 컴퓨터가 바로 ‘HAN-8’이었다.

　“HAN-8은 16비트인 ‘HAN-16’을 위한 준비 작품이었어. 미국은 1978년 이미 8비트 컴퓨터가 나와 1982년쯤 16비트, 1986년께는 32비트 제품이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어. 우리 목표는 16비트 제품을 선진국과 동시에 세계 시장에 내놓는 것이었지.”

　그의 판단은 주효했다. 당시 개발한 컴퓨터는 비록 세계 무대에 내놓기는 좀 미흡한 수준이었지만 컴퓨터 분야에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기술력을 확보하면서 국내 기업도 자신감을 가졌고 시장이 아연 활기를 띠었다. “따지고 보면 기술적으로 미성숙한 민간 기업을 돕기 위한 방안을 정부 차원에서 고민한 결과가 바로 국산화였어. 생산 준비, 실험 준비, 개발 시설을 완비하고 필요한 기술 인력을 모두 준비해 놓으면 민간 기업에서 초기 투자 없이 바로 컴퓨터 산업에 뛰어들 거라고 예상했었어.”

　그러나 이용태 회장은 이후 정부의 다소 소극적인 태도는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토로했다. 국산화로 컴퓨터 산업의 ‘불씨’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후속 작업이 미진해 결과적으로 조기에 전자 강국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점 때문이다. 이 회장은 사실 이때 실망감에서 직접 삼보컴퓨터를 설립해 컴퓨터 산업에 뛰어들었다.

　“자원이 없는 우리는 결국 기술과 정보화만이 살길이야. 그때 정부가 좀더 강한 의지를 보였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달라졌을 거야.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어. 하드웨어는 적기를 놓쳤지만 소프트웨어 분야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어.”

　지금은 이미 산업계 전면에서 한참 물러나 있지만 이용태 회장은 아직도 전자·정보산업 육성만이 우리가 강대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여전히 식지 않은 열정과 관심을 보였다.

강병준기자 bj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