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후 특허·실용신안 등 IT 관련 지식재산권 출원이 해마다 증가하면서 우리나라는 지식재산권 출원 4위 국가로 발돋움했지만 여전히 대다수 국내 기업은 특허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신기술을 개발,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상품화하고 관련 특허도 획득했지만 뜻하지 않게 특허 분쟁에 휘말리면서 정상적인 기업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특허 분쟁의 부작용과 폐단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특허분쟁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책과 특허법률 서비스 향상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는 무엇이 마련돼야 하는지 짚어본다.
지난 2008년 4월 18일 서울남부지방법원. 3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법체계에서 초유의 판결이 내려졌다. 특허를 전문으로 다루는 특허심판원과 특허법원에서 인정한 특허 기술을 서울남부지방법원이 ‘특허에 무효 사유가 있다’며 정반대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특허법원은 날로 증가하고 있는 산업재산권 재판의 신속성과 적정성 확보를 위해 1998년 출범한 기관이다. 형식적으로는 1심이지만 준사법기관인 특허심판원의 심결 등에 대한 소를 담당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항소심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2심, 즉 특허법원은 고등법원급 위치에 있는데 이 고등법원의 판결이 1심 지방법원에서 뒤집혔단 얘기다.
◇53개월간의 피말리는 특허분쟁=사건의 발단은 지난 2004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반도체 검사 장비 업체인 파이컴이 신제품(멤스카드)을 출시하자 경쟁사인 미국 폼팩터가 2004년 2월 서울남부지방법원에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다. 파이컴이 개발한 신제품이 자사의 특허 기술 4건을 침해했다는 게 이유였다. 파이컴 측은 폼팩터의 제소가 터무니없다며 특허심판원에 무효심판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폼팩터의 기술이 오히려 특허가 될 수 없다며 특허가 정당한지를 가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특허심판원은 폼팩터의 손을 들어줬다. 폼팩터의 한국특허 4건 모두 유효하다고 심결한 것이다. 파이컴은 항소했다. 특허심판원의 심결에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곳, 특허법원에 판단을 물었다. 특허법원은 이번엔 일부 파이컴의 손을 들어줬다. 국내 등록된 폼팩터의 특허 4개 중 3개가 특허 무효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특허법원은 2006년 2월 나머지 1개(제조공정 관련 특허 제252, 457호)는 특허심판원의 심결대로라며 폼팩터의 특허 기술임을 인정했다.
폼팩터는 자사의 특허 4개 중 3개를 잃었지만 특허법원에서도 인정받은 나머지 1개로 파이컴에 압박을 계속했다. 폼팩터 측은 또 다른 지방법원에 특허침해소송 및 생산중단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힘든 법적 공방이 오가는 사이, 2007년 9월 폼팩터 특허 4건 중 2건이 대법원으로부터 무효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문제의 판결이 2008년 서울남부지원에서 나왔다. 서울남부지원은 폼팩터가 파이컴을 상대로 특허침해소송을 처음 접수한 곳이다. 서울남부지원은 대법원이 특허 2건에 대해 무효 판결을 내리자 이를 제외한 나머지 폼팩터 특허 2건에 대해 본격적인 심리를 시작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서울남부지원이 심리한 특허 2건 중에는 지난 2006년 6월 특허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특허 1건(특허 제252, 457호)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2008년 4월 18일, 사건이 불거진 지 만 4년 만에 나온 특허침해소송 판결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서울남부지원 민사 11부는 판결문에서 “폼팩터가 보유하고 있는 특허 2건은 신규성 또는 진보성 결여의 무효사유가 있으므로 원고(폼팩터)의 특허권 침해금지는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파이컴이 폼팩터의 특허도 침해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며 “폼팩터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했다.
이를 다시 풀어보면, 폼팩터가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특허는 특허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법원이 침해소송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한 사안을 놓고 특허를 전문으로 다루는 특허법원과 지방법원의 판결이 정반대로 충돌하는 모순은 이렇게 벌어졌다.
◇법원 간 모순, 가중만 두 배=끝까지 쟁점이 됐던 폼팩터의 특허 1건은 2008년 6월 대법원이 특허법원의 유효판결을 파기 환송하면서, 최종적으로 폼팩터의 특허 모두가 무효되는 것으로 현재 마무리됐다. 결과적으로 고등법원급인 특허법원의 판단보다 1심인 서울남부지원의 판단이 옳았다는 게 입증된 셈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특허를 둘러싼 사법 시스템에 있다. 특허무효소송이든 특허침해소송이든 분쟁이 된 특허를 놓고 똑같이 이 기술이 보호받아야 되는지 아니면 보호할 가치가 없는지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특허무효소송은 ‘특허심판원-특허법원-대법원’으로, 특허침해소송은 ‘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으로 분리돼 있다 보니 진실을 밝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파이컴만 떠안았다.
파이컴을 변리했던 법무법인 광장의 권영모 변호사는 “이런 문제들이 생기면 사건의 당사자들은 정말 피를 말리게 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세계에선 특허분쟁을 핑계로 경쟁사를 고사시키려는 일들이 흔한데 법원의 판결이 늦고 또 상반된 판결을 내리는 모습을 보이면 누명을 쓴 기업들은 상당한 고충을 당한다는 얘기다.
권 변호사는 “파이컴 사건도 오너가 아닌 CEO였다면 경영에 대한 부담 때문에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을 것”이라며 “가장 근본적으로는 특허 심사의 질을 높여 불필요한 특허 분쟁을 줄여야겠지만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신속히 판단해 주는 사법 체계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파이컴이 본 피해와 고충
파이컴은 최종적으로 폼팩터의 특허 4건을 모두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파이컴이 잃은 게 더 많았다. 파이컴은 폼팩터의 특허침해소송에 대응하는 동시에 폼팩터 특허에 대한 무효청구소송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진실을 밝히는 데 무려 4년 5개월(53개월)이란 시간을 들여야 했다. 53개월의 법적 다툼은 단순히 시간과 비용 문제가 아니었다. 특허 분쟁은 주장 대 주장이 충돌하는, 즉 폼팩터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고 반대로 파이컴이 옳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현실은 달랐다. 폼팩터에는 특허 분쟁이 파이컴을 압박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파이컴 관계자는 “새로운 고객을 만들기 위해 힘들게 미팅 날짜를 잡고 샘플 제품이라도 소개하려 하면 폼팩터 측에서 특허소송을 꺼내 들었다”며 “바이어들도 잡음이 나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까 영업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파이컴이 거래를 하려던 예비 고객사들에 폼팩터는 “우리가 소송에서 이기면 파이컴뿐만 아니라 파이컴 제품을 쓴 업체들도 특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이란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파이컴은 모두 억울하고 부당했지만 잡음을 싫어하는 바이어들을 탓할 순 없었다. 오직 법원의 판결만이 필요했다. 그래서 싸움을 시작했지만 결과는 53개월이 지나야 볼 수 있었다.
파이컴 측은 특허 분쟁이 없었으면 매출 구조가 지금보다 건전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대형 거래처 한 곳으로 인한 매출이 전체의 90%고 나머지가 10%인데, 분쟁 없이 신규 거래처 확보가 성공적으로 이어졌다면 이 비율이 60 대 40, 70 대 30 정도로 보다 안정적으로 바뀌고 해외 매출도 지금보다 2∼3배 좋아졌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파이컴 측은 “정말 특허소송은 강자들의 위치에선 가장 최선의 방어라는 걸 느꼈다. 특허소송을 제기해 후발주자의 발을 묶어놓은 뒤 선발주자는 제품을 팔면 되니까 마지못해 패소해도 공격자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씁쓸해 했다.
탐사보도=김종윤팀장·김원석·윤건일기자 tamsa@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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