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은 1957년 경남 김해시 한림면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대지만 해도 2000평이 넘는 큰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여섯 살 때 부친이 작고하면서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다. 가족들은 서울 이문동에 부엌도 없는 사글세 단칸 쪽방으로 이사했다. 이때 조현정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충무로에서 가전제품을 고치는 일을 했다. 공부와는 담을 쌓은 상태였으나 그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지 83일 만에 합격했다. 1974년 용문고에 입학했다. 인하대 3학년 재학시절인 1983년 8월 대학생 벤처 1호인 비트컴퓨터를 창업,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 청구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는 또 2005∼2006년 벤처기업협회장을 역임, 벤처 산업 활성화에도 일조했다.
난센스 퀴즈 하나. 초복·중복·말복 등 삼복 다음엔 무엇일까. 답은 ‘광복(?)’이다.
광복절(8월 15일)은 간판 IT 벤처기업인 비트컴퓨터의 창립일이기도 하다. 25년 전이다. 왜 하필이면 회사 창립일을 국경일로 잡았을까! 특별한 이유는 없다. 창업하느라 분주한 인하대 3학년 조현정 학생에겐 휴일이고 평일이고 별반 차이가 없었을 뿐이다.
조현정 회장은 ‘최초’ ‘1호’란 수식어를 수없이 달고 다녔다. 벤처기업 1호, 소프트웨어 전문회사 1호, 의료정보 전문 회사 1호 등등. 얼핏 헤아려 보니 무려 100여건이 넘는다고 한다. 업력 25년은 부침이 심한 ‘IT 벤처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이른바 ‘굴뚝기업’의 기준으로 봐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장수 비결이 궁금했다. 지난 12일 비트컴퓨터 사옥 대회의실에서 만났다. 워낙 유명세를 많이 탄 스타급 CEO인 그에게서 ‘뭐 새 얘기가 나올 게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갑자기 들었다. 기자로서 10여년간 비트컴퓨터를 직·간접적으로 지켜본데다 이미 언론에 숱하게 그의 성공기가 소개됐기 때문이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신기술 흐름을 초기에 정확히 읽고 고객을 이끄는 게 장수 비결이었다. 누구나 말하는 비결이다. 새 발견도 있다. 그만큼 제대로 이 비결을 실천한 사람은 드물다는 점이다.
◇적자를 각오한 SW 교육 사업=비트컴퓨터는 4분기 연속 흑자 구조를 이었다.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다만 의료정보 사업부문·유헬스 사업부문 등 4개 사업부문 중 적자 기조를 유지하는 사업부문이 있다. 바로 교육사업부문인 ‘비트교육센터’다. 올해로 설립 18년째인 비트교육센터는 초기 3년만 반짝 흑자를 기록했을 뿐 15년 동안 내리 적자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 속성상 적자 사업은 단연코 구조조정 대상 1순위다. 그런데도 18년 동안 비트교육센터를 고집스럽게 운영한다. 흑자 모델로 바꿀 수도 있다. 수강생을 지금보다 더 많이 받으면 된다. 비트교육센터 입학 경쟁률이 5 대 1인데 이를 낮추면 수강생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또 300여평되는 비트교육센터의 여유 공간들을 외부에 임대하면 손쉽게 흑자를 유지할 수 있다.
“비트교육센터는 기획 당시부터 적자 모델이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흑자 모델을 거부한다는 조 회장의 말은 단호했다. 왜냐하면 사회공헌 차원에서 시작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SW프로그래머를 양성, 우리나라를 SW 강국으로 만들고 우수 SW 인력를 구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는 중소기업을 돕고자 비트교육센터를 만들었다. 지원 학생의 실력이 떨어지면 수강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수강생은 일요일도 없이 6개월 과정 동안 1800시간을 이수해야 한다. 마지막 관문인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 합격해야만 수료증을 내준다. 거의 스파르타식 운영이다.
조 회장이 90년부터 18년 동안 배출한 비트교육센터 졸업생은 7800여명에 달한다. 게다가 이들은 현장에 바로 투입해도 될 정도로 실력이 탄탄하다. 100%의 취업률을 자랑한다. 비트교육센터를 ‘IT사관학교’로 부르는 이유다. 대학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조 회장 개인의 열정이 이뤄냈다.
◇“1년은 12개월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비트컴퓨터 강남 사옥 엘리베이터 내부엔 ‘빨리 문 닫고 꿈을 키우러 갑시다’란 표어가 붙어있다. 문을 빨리 닫으면 전기가 더 많이 소비된다. 고유가 시대에 반하는 표어인 셈이다. 조 회장은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가치를 모르면 꿈을 실천하는 젊은이가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닫힐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빨리 문 닫고 일하거나 공부하는 장소로 신속하게 움직이란 뜻으로 붙였다고 한다. 비록 하루에 수분을 아끼는 데 그치지만 그 시간이 1년 동안 쌓이면 남보다 그만큼 꿈 실현을 위해 활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시간에 대한 그의 가치관은 곳곳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창업 당시 그는 청량리 맘모스 호텔 스위트룸을 빌려 사무실로 2년 6개월가량 사용했다. 그는 “밤낮없이 일하기 위해 24시간 출입이 가능하고 냉난방이 좋은 곳이 필요했다”며 “임대료 싼 사무실을 얻어 12시간 일하는 것보다 호텔을 얻어 17시간을 일하는 게 전체 효용가치를 따져볼 때 훨씬 싸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또 직원을 뽑을 때 출·퇴근 시간이 편도로 1시간 20분 이상 걸리면 지원자를 결코 채용하지 않는다. 길 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게 이유다. 12개월 이상 일할 수 있는데 출·퇴근 시간 탓에 12개월 이하로 시간이 줄어들면 회사나 개인에게 손해란 생각이다.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조현정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그는 청소년에게도 시간의 소중함을 설파한다. 매년 1억4000만원을 장학금으로 주는데 그 조건이 매우 독특하다. 학생들이 ‘담배를 절대 피우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만 장학금을 준다. 건강 말고도 이유가 있다. 담배를 피우면 5분 이상의 시간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만큼 공부에 매달리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시간 절약 문제로 사옥을 옮기기도 했다. 89년 당시 정부가 절전운동의 일환으로 엘리베이터 격층제 운영 제도를 도입했다. 위반 시 벌금도 매겼다고 한다. 조 회장은 엘리베이터 격층제 운영을 하지 않는 대신에 벌금을 내겠다고 제안했으나 건물주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선릉 사옥을 강남으로 옮겼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다=조 회장은 모든 사람들이 대중화한 코볼에 열중하는 80년대 말 C 언어 확산에 매달렸다. 당시 전국에서 C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100명도 안 됐다. 코볼은 분업화를 할 수 없지만 C 언어는 분업화가 가능, SW 개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만약 그가 이윤 추구를 앞세웠다면 C 언어 대신에 코볼을 비트교육센터의 과정으로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C 언어 대중화를 위해 코볼 대신 C 언어 교육에 나섰다. 수요도 없는 C 언어 전도사에 나섰으니 적자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의 C 언어 확산 야망은 결국 C 언어 계열인 자바 확산까지 이르게 했다.
조 회장은 “80년대 말 C 언어를 모르던 SW기업들은 90년대 들어 대부분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 사업도 초창기에 시작했다. IT 최신 흐름을 신속히 비즈니스에 흡수했다. 지금은 일반화한 솔루션인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주문자처방전시스템·전자의무기록·원격진료 등이 대표적이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먼저 들어 가서 먹잇감을 낚아 채는 동물적 감각이 그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했다.
◇“기술만 기대면 제 가치 인정받지 못해”=의료 정보 한 분야만 집중하니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를 겪을 뻔도 했다. 조 회장은 고객의 요구를 빨리 읽고 먼저 비즈니스를 제안하는 노하우로 극복했다.
그는 머지않아 단순한 기술력이 아닌 지식서비스로 기업이 승부를 벌이는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본다. 기업이 기술로만 승부하면 가격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창립 25주년을 맞아 새로운 도전 목표를 세웠다. 2006년 대한민국 SW의 내수(162억달러) 대 수출(13억달러) 비율을 앞으로 역전시킨다는 것. 그는 “일본에 비트교육센터 출신 3000명을 보내 이러한 도전을 달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세가 기울어 15세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충무로의 전파상에서 가전 제품 수리공으로 일하던 조현정. 어느덧 나이는 지천명(50세)을 지났다. 그러나 총명한 눈빛만큼은 10대 그대로인 그가 20∼30대 젊은이와 함께 첨단 지식서비스 강국의 깃발을 들었다.
◆조현정 회장은
조현정은 1957년 경남 김해시 한림면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대지만 해도 2000평이 넘는 큰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여섯 살 때 부친이 작고하면서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다. 가족들은 서울 이문동에 부엌도 없는 사글세 단칸 쪽방으로 이사했다. 이때 조현정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충무로에서 가전제품을 고치는 일을 했다. 공부와는 담을 쌓은 상태였으나 그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지 83일 만에 합격했다. 1974년 용문고에 입학했다. 인하대 3학년 재학시절인 1983년 8월 대학생 벤처 1호인 비트컴퓨터를 창업,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 청구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는 또 2005∼2006년 벤처기업협회장을 역임, 벤처 산업 활성화에도 일조했다.
안수민기자 sm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