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냉전 상징서 문화 중심지로

 요즘 유럽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 면에서 잘나가는’ 젊은이들이 멋진 주말을 보낼 최고의 행선지로 꼽는 도시는 어디일까? 다른 대륙으로부터 날아온 관광객에게는 화려한 과거의 영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런던, 파리 그리고 로마의 인기가 여전하지만 유럽의 신세대들은 ‘새로운 도시’ 베를린에 열광하고 있다.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 수(통근자를 제외한 투숙인원 기준)는 1999년 900만명을 넘어서더니 매년 100만명 이상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지속해 2007년 1700만명을 돌파, 유럽 4위의 관광도시에 등극했다. 각종 문화행사와 국제 비즈니스 행사로 활기가 넘칠 뿐 아니라, 유럽 관광객들이 중시하는 야간 활동(nightlife, 한국의 ‘밤문화’와 비슷한 말이지만 부정적 어감이 훨씬 약하다)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최첨단 감각의 클럽들이 즐비하다. 특색 있는 중저가 부티크호텔(규모는 작으나 디자인 감각을 강조한 고급 관광호텔)의 수가 크게 는 것도 숙박 관광객 증가에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세대식 표현으로 ‘쿨(cool)’하고 ‘힙(hip)’하다. 바로 요즘 베를린의 이미지다.

 베를린은 누구나 알 듯 세계 4위 경제대국 독일의 수도고, 오래 전부터 수도였다. 무엇이 2000년대 베를린을 ‘새롭고 젊게’ 만들었을까? 2차대전 이후 이 도시는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으로 동서가 나뉜 채 1989년 동서독이 통일될 때까지 54년간 상징적인 수도였을 뿐이었다.

 이 기간 경제대국 서독의 행정수도는 본이었고 통일 후 10년이 지난 1999년에야 행정부와 의회, 정부 기관 등이 베를린으로의 이사를 마쳤다. 대대적인 현대적 도시 개발이 시작된 지 불과 19년, 명실상부한 통일 독일의 수도로서 기능한 지는 10년이 채 안 됐다. 베를린이 ‘새로운 중심‘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다.

 화려한 역사적 건축물들과 값을 따지기 어려운 유물 컬렉션을 자랑하는 다른 유럽 강대국들의 수도와는 달리, 19세기에야 통일을 이루고 산업혁명의 지각생인 독일의 수도는 상대적으로 소박하다. 바꾸어 말하면, 유적이 주는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20세기 초반 모더니즘을 꽃피운 곳답게 근현대의 정신을 담은 걸작 건축물들이 베를린의 현대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한몫 단단히 거든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신국립미술관, 한스 샤룬의 베를린필 콘서트홀이 그렇고, 바우하우스의 발자취가 그로피우스가 지은 건물에 담겨 있다.

 베를린은 냉전 체제의 종언을 고한 곳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1970∼80년대 동서 냉전 시대에 유소년기를 보낸 젊은이들에게 베를린은 옛 시대 이념으로부터의 구속을 벗어나게 해 주는 정신적 자유지대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기에 알맞은 공간인 셈이다.

 슈퍼파워에 저항하고 세계평화를 꿈꾸는 유럽의 진보적 젊은이들에게 제국주의를 극복한 독일의 수도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나치당, 2차대전 패전, 홀로코스트의 어두운 과거는 전후 독일의 진실되고 거듭된 사죄와 상응하는 실질적인 과거청산 덕에 더 이상 현대의 베를린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 있다.

 2005년 조성된 홀로코스트 위령공원에서는 스러져간 생명을 상징하는 수천개의 콘크리트 육면체가 베를린을 내리누르며 세기가 바뀌도록 용서를 구하고 있다.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유대 박물관은 건물 자체만으로도 현대 건축사에 빛날 걸작인데,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의 아픈 역사를 녹여내는 정화의 공간이다.

2차대전 말 공습으로 파괴된 제국의회 의사당의 돔은 영국의 거장 노만 포스터가 설계한 현대적 유리 돔으로 대체돼 일반인에게 열려 있다. 베를린 시민과 관광객은 투명한 돔의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 베를린 시내를 굽어보며 통일 독일의 의사당을 발 아래 둘 수 있다.

 새로운 베를린 건설은 현재진행형이다. 가히 유럽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에는 과거로부터 남겨진 모습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딛고 일어선 현재를 즐기기 위해 간다. 분단국의 수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도시 서울은 베를린이 부러울 것이다. 관광객 유치에서 주변국 수도들과의 차별화는 항상 힘겹다.

베를린을 벤치마킹해서 얻을 점은 유적과 민속으로부터 현대성과 문화로의 중심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과 저비용 항공을 활성화하고 숙박 인프라를 정비해 접근성과 거주성을 높일 것, 도시가 담는 새로운 정신을 표현하는 랜드마크들을 개발할 것 등이다.

 브라이튼(영국)=박상욱 서섹스대학 과학기술정책연구단위 sangook.park@sussex.ac.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