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텔레마케팅(TM) 산업은 정부와 기업의 의도적인 육성전략으로 시장 규모를 키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텔레마케팅 시장은 정부의 의도적인 육성정책이 아니라도 산업발전 단계에 비추어 볼 때 성장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기업들은 자체 고객센터를 지방으로 대거 이전했고 080 서비스의 등장으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관련 장비 및 솔루션 시장도 톡톡히 재미를 보며 동반성장했다. 개인당 1PC 1휴대폰 시대로 대변되는 정보통신 서비스의 성장과 신용카드, 보험 등 제3금융 시장의 성장은 텔레마케팅 시장의 르네상스 시기를 앞당겼다.
TM 산업은 고용 창출에도 일조했다.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사람만 3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TM과 관련된 장비, 솔루션, 지원 업무 등을 합치면 많은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는 중요한 산업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TM 산업은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유탄을 맞으면서 숨고르기에 접어들었다. 기업들은 확장보다는 이익창출로 무게중심을 이동하면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생계와 IT 서비스 산업의 견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TM 산업이 다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철저한 정보관리가 최우선=TM 산업이 다시 부흥을 하기 위해서는 업계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기주 한국콜센터서비스학회장(전남대 교수)은 “종종 발생하는 고객정보유출 및 불법 활용 사건은 지난 10여년간 관행처럼 이루어진 TM 업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 TM 업계 전체에 대한 신뢰도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말했다.
일부 TM 업체들은 고객 정보를 사고파는 것이 당연시됐다. 개인정보를 구했더라도 고객의 동의 없이 다른 분야 영업에 활용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는 업계 스스로 자정노력이 필요한 때다.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자율규제 노력이 촉매제가 돼야 한다. TM 영업이 고객사를 대신하는 것이며 고객의 정보 보호가 영업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기본적인 인식에서 다시 출발을 해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히시누마 치아키 일본텔레마케팅협회(JTA) 회장은 “일본 TM 산업이 지난 2005년 개인정보보호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철저한 개인정보보호를 기본으로 성장했다”며 “고객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으면 한국 TM 산업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유연한 대응 필요=업계의 자성과 함께 정부도 애정을 가지고 TM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규정을 엄하게 하는 것은 필요하다. 동시에 고용창출 등 TM 산업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동시에 살펴야 한다. 소비자는 텔레마케터의 전화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TM으로 인해 받는 수혜도 많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황규만 한국컨택센터협회 사무총장은 “소비자가 귀찮아하는 거 같지만 TM 영업으로 인해 많은 계약이 체결되는 등 소비자에게 유익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몇 가지만 허가하고 나머지를 못하게 하는 방식(옵트 인)보다는 소비자가 선택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을 도입하라고 촉구한다.
김남국 IMC텔레퍼포먼스 사장은 “미국이나 호주 등과 같이 TM 영업이 싫은 소비자는 수신제한목록(Do not call list)에 등록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정보 유출 또는 무단 사용 업체와 수신제한 기준을 어긴 TM 업체에는 법률을 통해 강하게 제재하면 시장도 살고 개인정보도 보호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업계도 적극적 움직여야=TM 업체들도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TM 업계에는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 한국컨택센터협회 등에서 소식지 정도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정부, 소비자, 고객사 등을 대상으로 한 대외 홍보 작업은 찾을 수 없었다. 그동안 쌓여진 TM 산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한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통망법) 개정안’에도 TM 업계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은 강하게 표출됐으나 고용 창출·지역경제 활성화·후방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TM 업계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박광진 한국정보보호진흥원 단장은 “법이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으며 사회적인 합의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을 찾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지적했다. TM업계의 논리와 공론화를 통해 논리 다툼을 벌였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황규만 한국콘택센터협회 사무총장 인터뷰
최근 개정된 정보통신망법에는 텔레마케팅 업체의 의견은 정확하게 반영돼 있지 않았다. 이 법대로라면 사실상 전화 영업을 관둬야 하는 지경이다. 모든 것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능하면 업계 스스로 자정노력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고 그래도 안 된다면 법을 만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불법업체를 제외한 정상적인 업체들은 과거처럼 무조건 전화를 걸어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는 않는다. 체계적인 보안 교육과 정보기술(IT)을 활용해 마케팅을 한다. 이 과정에서 텔레마케팅을 귀찮게만 생각했던 소비자도 좋은 정보를 듣고 계약을 한다. 고객에게 새로운 상품과 저렴한 패키지 상품을 소개하거나 좀 더 고객에게 유리한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먼저 전화를 걸어 지금 통화가 가능한지 물어보고 가능한 분에게만 상품 설명을 해서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없어야 한다. TM 업체들의 협회를 중심으로 자체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업계 스스로 선진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수십만명의 생계가 걸려 있는 TM 산업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본다.
◆정기주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인터뷰
업계가 정부나 입법부에 고객정보 활용에 대한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법률적 개선을 통한 탈출구 마련은 단기적인 안목이다. 시장은 소비자가 결정하고 브랜드의 생사는 소비자 선호도에 달려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강압적이거나 기만적인 상술(push marketing)보다는 소비자 승인(permission)기반의 마케팅이 효과가 훨씬 오래간다.
TM 업계는 일반적으로 도덕 불감증이 만연하며 개인 정보 의식도 부족하다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불법 유출된 고객 DB로 영업하는 단기적인 매출 창출 유혹 때문에 장기적으로 회사의 가치를 바겐세일 하는 행위다. 불법 DB활용에 대한 편익계산을 정확히 해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TM 기업들의 자기 혁신 노력이 부재하다. 종업원에 의한 불법행위 감시를 위해 콘텐츠 모니터링 소프트웨어 등을 설치하고 직원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 TM협회도 불법행위로 업계의 전반적 신뢰도에 손상을 주는 회원사에 형식적이 아닌 가혹한 제재조치를 취하는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업계에서는 규제 완화 요구보다는 소비자와 승부를 하려는 기업전략의 변화, 고객을 착취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보는 고객철학 및 윤리경영의 강화, 그리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기 혁신 경영에 대한 강력한 추진이 필요하다. 철저한 고객 지향적 경영, 소비자 정보보안 교육, TM업계의 자발적인 정화 의지가 TM산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기획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