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8월 말이다. 뜨거웠던 여름도 가을 단풍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농부가 가을 수확에 나서는 것과 동시에 영화계에서도 찬바람이 불면 흥행 기대에 한껏 부푼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엔 계절에 따라 관객이 들고나는 차이가 현격히 줄었지만 추석을 전후한 가을 시즌이 1년 중 대목임에는 분명하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 쿵후 영화가 추석과 설날에만 개봉했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래서 추석 극장가를 앞둔 영화계는 모처럼 희색이 돈다.
그러나 추석 영화판에서 가슴 졸이는 사람들이 있다. 대작의 위세 속에서 힘겹게 한두 극장을 잡은 ‘단관 개봉’ 수입 영화 업자들이다. 이들은 영화의 작품성과 퀄리티는 자신 있지만 블록버스터 사이에서 흥행을 보장받기가 쉽지 않아 연일 좌불안석이다. 그래서 홍보 담당자들은 하루에도 언론사에 전화를 수십통 돌린다. 한 줄의 기사를 위해서다. 그러나 노출은 쉽지 않다. 기자도 노출을 해주고 싶지만 독자의 반응을 고려한 데스크의 철통 같은 수비를 뚫긴 힘들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다. 말 그대로 단관 개봉 보석들이다. 힘들게 방문한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면 단관 개봉에 눈을 돌려라. 메마른 당신의 교양 지수에 피를 돌게 할 ‘단관 시네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누들(아일레트 메나헤미 감독)’이다. 지난 14일 개봉한 이스라엘 국적의 ‘누들’은 승무원과 중국인 아이(첸)와의 순수한 교감을 그린 영화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상영되고 있다. 2007년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미리라는 한 여자의 작지만 용기 있는 행보를 뒤쫓으며 2000년대 초반 이스라엘을 강타했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매력으로 많은 국내 여성에게 강추(강력추천) 영화로 자리 잡고 있다.
28일 개봉한 ‘스마트 피플(놈 머로 감독)’ 역시 빼먹으면 서운하다. 메가박스, 시너스 등에서 이 작품은 감성적인 가을에는 역시 소품영화가 돋보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융통성 없는 교수 로렌스와 그의 딸 바네사, 그리고 로렌스의 사고 뭉치 동생이 가세하면서 벌어지는 드라마는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이 작품의 주요한 볼거리는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면면이다. ‘파 프롬 헤븐’ 등 2000년대 들어 원숙미를 더하고 있는 데니스 퀘이드는 무심한 지식인의 표본인 로렌스를 능청스럽게 연기하기 위해 체중까지 12㎏ 늘렸고 ‘주노’로 주가가 급상승한 21살 여배우 엘렌 페이지는 똑똑하고 당돌하지만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바네사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냈다.
마지막으로 톱모델과 자동차 파킹맨의 스캔들과 그 뒤에 감춰진 비밀을 유쾌하게 그린 프랑스표 로맨틱 코미디 ‘발렛(프랑시스 베베르 감독)’은 두말하면 입 아픈 단관 시네마의 절대 고수다. 이 작품은 할리우드 영화 ‘노팅힐’을 프랑스식의 세련된 유머와 재치, 그리고 수상스러운 스캔들로 버무려 놓은 영화로 관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인기가 높은 베베르 감독은 한심스럽지만 심성이 따뜻한 인물을 전면에 내놓고 계급이나 불륜 등 씁쓸한 현실 비평을 숨겨놓는 것이 특징으로 이 작품에도 그의 장기는 120% 발휘됐다. 베베르 감독은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은행털이 아빠와 나’를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 이 영화는 ‘프라이스리스’를 통해 국내 관객에도 익숙한 게드 엘마레 ‘제8요일’ ‘마이 베스트 프렌드’의 연기파 배우 다니엘 오테유, 배우 겸 감독 대니 분 등 초호화 배우들이 출연만으로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한정훈기자 exis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