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32)정부기관 민영화와 출연연 통합

[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32)정부기관 민영화와 출연연 통합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1981년 1월 통합 출범한 출연연구기관 현황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옛 KIST)를 필두로 탄생하기 시작한 출연연구기관 15곳은 1980년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9개로 통폐합된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 전반에 메스를 대면서 취해진 조치다. 출연연 통폐합은 연구소 몸집을 축소하고 적자경영을 탈피하는 데 도움을 줬지만 통합 이후 각종 부작용으로 과학기술계를 혼란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15개 연구소를 9개로 통합=출연연 통폐합의 근거는 1980년 과학기술처가 내놓은 ‘이공계 출연연구기관 기능 재조정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연구기관들은 기능상 △국책연구기관 △산업기술연구기관 △기초연구기관 3개 범주로 분류됐다. 국책연구기관은 국책사업의 정책 개발 분야 응용연구 및 기술개발을 담당하는 곳으로 원자력연구소·표준연구소 등이 해당됐다. 산업기술연구기관은 화학연구소·기계연구소 등이 포함됐고 산업계에 대한 기술지원과 위탁기술 개발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또 기초연구기관은 고급과학기술인력 양성, 중장기 국책연구개발, 기초과학연구 등을 수행하는 곳으로 한국과학원(KAIS) 등이 속했다.

 통합원칙으로는 연구기관 단위를 효율적인 관리·운영이 가능한 적정 규모로 통합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또 인적규모는 500명 안팎으로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런 결정에 따라 1981년 1월 새로 출범한 연구소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한국에너지연구소·한국동력자원연구소·한국표준연구소·한국기계연구소·한국화학연구소·한국인삼연초연구소·한국전기통신연구소·한국전기기술연구소 9개였다.

 새로 출범한 연구소의 소속부처도 기존 과학기술처·상공부·체신부·동력자원부·공업진흥청·전매청 등으로 나뉘어 있던 것을 과기처로 통합했다.

 ◇이어지는 통합 후유증=국보위는 원칙을 내세워 통폐합을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정책개발·산업기술연구 등 각 범주에 연구소 수를 기계적으로 배정해 통폐합 대상 연구소들이 결정됐다.

 이런 통합과정은 이후 큰 후유증을 불러왔다. 특히 옛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원(KAIS)이 통합된 옛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문제로 대두됐다. 옛 KIST는 제3공화국 경제개발정책 초기부터 종합연구를 수행해왔고 KAIS는 석사급 이상 이공계 고급과학기술 인력에 주력해왔다. 연구기관과 교육기관이라는 두 기관의 통합은 당시 과기처가 내세운 ‘기능 중심 통합’ 원칙에 맞지 않는 결정이었을 뿐 아니라 추후 연구와 교육 기능의 융화 및 연계에 어려움을 겪게 했다.

 또 두 기관이 통합되면서 육사 13기 출신 이정오 교수(KAIS)가 제5대 옛 KIST 소장 및 제6대 KAIS 원장에 겸직 발령을 받았다. 이정오 교수는 이어 제5대 과기처 장관으로 입각까지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KAIS 출신이 원장 자리에 오르면서 통합된 KAIST에서는 ‘KAIS’ 편향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옛 KIST 출신 교수들이 인사 및 정책 등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기 때문이다.

 연구소 통폐합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였다. KETRI는 1976년 옛 KIST 부설 전자통신연구소에서 분리돼 출범한 통신기술 전문연구소였다. 전자통신연구소에서 분리 출범했던 다른 연구소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는 1980년 통폐합 당시 거의 원상태를 유치한 채 과기처 소속으로 새 출범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 두 기관이 새로 출범하면서 국내에서는 통신부문과 전자부문 기술 개발이 양분돼 상호 기술통합이나 지원체계가 어려워지는 상황을 겪어야 했다.

 ◆ 나정웅 한국과학기술원(KAIST) 명예교수 인터뷰

“장기적인 계획 없이 효율성만 따지는 기관 통합은 긴 기간의 후유증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세계적인 기초 기술 연구결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난 1980년 출연연 통폐합 당시 한국과학원(KAIS)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나정웅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67)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이같이 밝혔다. 나 명예교수는 지난 1971년 KAIS 교수로 부임한 이래 옛 KIST, KIT와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35년간 전자학부장, 교무처장, 전자전산학과장 등을 두루 경험했다. 한국방송공사(KBS) 이사, 방송위원회 위원, 한국방송공학회장, 대한전자공학회장, 광주과학기술원장 등 과학기술과 방송계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정년퇴임 후 KAIST 명예교수, 전자정보인클럽 회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1980년 국보위가 들어서면서 추진한 출연연 통폐합이 뚜렷한 비전 공유가 없는 채로 표면적인 기능 위주로 통합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고 설명했다. 나 명예교수는 “정부에서는 예산절감, KIST의 적자운영 탈피, 연구 시너지 등을 목적으로 통폐합을 단행했지만 교육 중심의 KAIS인력과 기초연구 중심의 KIST의 인력이 제대로 융화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KIST는 산업계와 직접 관련된 현장 문제 중심 연구를 하고 있던 반면에 KAIS는 후학양성, 논문지도 등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었던만큼 다른 두 기능이 한 기관에 통합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출신이 다른 두 인력들 간에 서로 자질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 KAIS 출신 원장이 새로 출범한 KAIST의 전권을 장악하면서 KIST 출신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등의 부작용도 겪었다고 전했다.

나 명예교수는 “결국 완전한 융합을 이루지 못했던 두 기관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면서 “결국 KAIS와 KIST가 다시 나뉘어 KAIS가 한국과학기술대학(KIT)과 통합되는 과정을 밟았다”고 전했다.

그는 현 정부도 과거의 교훈을 거울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관의 통합을 효율성 측면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 교수는 “우리가 세계적인 연구결과를 도출해 기술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장기적 미래 비전을 가져야 한다”면서 “공무원 시각의 탁상행정이 아닌 실제 현실을 반영해 신중한 진행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국가 기초기술연구은 한 가지 주제에 10년 이상 천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부담 없이 기초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된다면 최근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공계 기피현상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며 “국가 기술의 진보를 위해서는 꾸준한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황지혜기자 got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