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이었다. 인터뷰를 핑계로 그를 만난 것은 벌써 10여년만의 일이다. 소위 ‘잘 나가던’ 그가 언론을 기피한 것도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순전히 어려움에 빠진 회사를 살리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라는 게 그의 변(辯)이었다. 그런 그를 끌어낸 것은 창립 스물 다섯해를 맞는 의미 때문이었다. 두 손을 내저으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도 창립 4반세기를 맞았는데 차나 한 잔 하자는 말에 넘어갔다. 온화했다. 오랫만에 만나본 그를 감싼 느낌이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내비치고 주름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한 얼굴에 온갖 세상 풍파가 지나쳤을 법도 한데, 그를 다시 본 순간 그는 벌써 상대방에게 지극한 편안함을 선사했다. 표정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그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은은한 미소로 가득한 그의 얼굴은 그렇게 4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남석우 콤텍시스템 부회장(56). 벤처기업 사상 증권거래소 첫 직상장 기록을 갖고 있고, 올해 매출 1500억원을 바라보고 있는 기업을 이끌고 있는 남 부회장이 처음 뜻을 세운 것은 중학교 때였다.
사업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막연하긴 했지만 사업이란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교도 친구들이 인문계를 선호할 당시 자연계를 선택했다. 사업 기회가 많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그에게 사업에 눈뜰 기회가 생겼다. 1977년 동양시스템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사실상 그의 첫 직장이나 다름 없는 동양시스템은 산업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통신장비와 소프트웨어(SW) 기술 개발 경험을 갖게 해줬다. 세계적으로도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통신장비 개발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고, 국내에서도 하나 둘 관련 업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수와 수출이 늘어나면서 경제 규모가 확대됐고, 이에 따라 산업화, 전산화도 사회 각 분야로 진행됐다.
통신 및 전산장비 업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금융권과 통신업체의 장비 및 소프트웨어 수요는 일대 호기였다. 대부분 외산을 들여다 쓰는 일이 많았지만 한편으론 국산 장비 개발도 시작됐다. 사업 가능성이 도처에 열려 있었다. 금융과 통신분야에서는 특히 모뎀의 수요가 일기 시작했다. 당시 모뎀은 기업의 필수적인 온라인 통신수단이었다. 업무가 늘어나고 인력이 많아지면서 회선을 잘게 쪼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멀티플렉서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뜻이 맞는 친구 같은 동료와 동업을 결심했다. 1980년 마침내 그는 데이타콤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동업은 쉽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기술 개발이나 회사 경영에 이견이 노출됐다. 차라리 독립하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많아졌다.
# 모뎀 전문업체로 마포에서 첫 출발
1983년, 그는 마침내 독립을 결심했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용현빌딩에서였다. 창업자금은 자신이 몇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과 부모님 및 형님이 도와준 5000만원이 전부였다. 창업 아이템이나 시기가 좋다고 판단, 일단 출발부터 해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직원은 7명으로 시작했다. 모뎀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한 바 있어 우선 모뎀 개발부터 시작했다. 멀티플렉서의 개발도 시작했다. 직원들은 기술 개발에 몰두하고 회사의 대표인 자신은 영업을 전담했다. 이전 직장에서 맺은 인연들이 큰 힘이 됐다.
사업 성장 속도가 빨랐다. 제품 개발 시기가 맞아떨어진 데다 경쟁 업체도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업체가 없었다. 금융기관과 통신업체의 수요가 급증했다. 제품 공급과 기술 개발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직원도 늘었다. 회사 설립 이후 10년 동안 매년 2∼3번씩 회사를 옮겨다닐 정도였다. 회사 운영 자금을 고려한 탓도 있지만 회사의 규모가 그만큼 커질 것을 예견하지 못한 탓이 컸다.
사업 첫해 6000만원 가량의 매출을 올렸다. 빠듯한 사업자금 탓에 어려움을 감수하고 있었지만 첫 해 자본금 이상의 매출을 올린 것은 스스로 판단해도 대단한 성공작이었다. 이후 매출이 급증했다. 매년 매출이 2배 이상 증가했고, 이익규모도 커졌다. 네트워크통합(NI) 사업에 뛰어들면서 외형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경쟁력 강화에 힘쓴 탓이었다. 당시 J·K사 등이 경쟁업체였지만 매출성장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기술 개발과 한발 앞서 제품화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상장도 했다. 코스닥도 아닌 거래소 직상장이었다. 그만큼 기업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1997년 2월의 일이었다. 매출 신장세와 미래비전에 힘 입어 주식시장에서 회사의 신뢰도는 삼성전자를 넘어설 정도였다.
공모가는 4만원을 넘어서면서 업계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삼성전자가 당시 3만원대인 것을 감안하면 콤텍시스템의 공모가는 당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상장 이후 주가는 20만원대를 넘어섰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들어서기 전 20만원대에 올라섰다면 그야말로 기록적인 수치였다.
# IMF가 가져다준 환차손으로 위기 내몰려
하지만 그에게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하의 악화된 경제상황은 예외가 아니었다. 네트워크통합(NI) 사업을 하느라 해외 통신장비를 들여오며 체결한 단가 계약이 대규모 환차손으로 돌아왔다.
당시 모 은행과 LAN 장비공급 계약을 맺고 장비를 들여올 당시 환율은 900원대였는데, 대금지불 시점이 되면서 1800원으로 급등했다. 앉아서 150억원이 넘는 환차손을 안게 됐다.
치명타였다. 매출 600억원대의 회사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IMF로 인해 기업들의 연쇄 부도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대기업은 빅딜이 진행되는 와중이어서 온갖 루머는 회사를 곤경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긴축 경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직원도 줄여야 했다. 600여명의 직원중 90여명을 줄이기로 했다. 회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 많은 그가 결정을 내렸다. 구조조정 인력을 예정보다 반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직원의 임금을 10% 줄였다. 임원급은 30%까지 임금을 줄였다. 구조조정 인력을 줄이는 대신 고통을 분담하면서 견뎌내자는 취지에 임직원들이 동의한 결과였다.
회사는 빠르게 회복세를 탔다. 직원들이 고통을 분담하고 따라준 덕분이었다. 처음 회사를 설립하고 성장시켜 온 것은 그의 힘이 컸지만 어려움에 빠진 회사를 제 궤도로 올려놓은 것은 순전히 임직원들의 힘이었다.
그는 그래서 오늘도 직원들의 노고에 고마워하고 있다. 외형보다 내실을 중시하는 그의 현재 경영 스타일은 IMF가 남겨준 자산이기도 하다. 이전에 비해 그의 얼굴빛이 더욱 온화해지고 겸손하게 보이는 것 역시 느낌 탓만은 아닐 것이다.
# 100년, 200년 가는 기업 일굴 터
그에게 2008년 9월 1일은 참으로 의미있는 날이다. 기업을 창립한지 25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흥망성쇄가 1년, 아니 6개월 단위로 변화한다고 하는 오늘날, 4반세기가 그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다시 시작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그가 꿈꾸던 기업을 일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4반세기를 넘어 100년, 200년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견뎌내는 글로벌 기업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는 요즘 기업의 성장이 결코 한 사람의 능력이나 몫이 아니고 조직의 몫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기업은 시스템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모든 조직을 갖추는게 중요하다. 나아가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것도 기업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이며, 그가 요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올해 상반기 그는 매출 620억원에 순이익 18억원을 달성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은 64% 성장했고, 순이익은 90% 증가했다. 상반기 모든 기업이 어렵다고 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 성적은 선방한 것이다. IMF 이전의 활력을 되찾은 느낌이다.
이 정도라면 연말까지 1500억원의 매출은 무난하다. 일본의 FTTH 시장이 확대되고 있고, 독자 개발한 TDMoIP 게이트웨이로 개척하기 시작한 유럽과 북미시장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서도 FTTH, IPT 등은 물론 보안, 수질환경 솔루션 등으로도 사업 다각화가 진행 중이다.
자금력도 생겼다. 이제는 인수합병(M&A)에도 나서 사업다각화를 지원할 생각이다. 성급한 투자보다는 검증된 M&A가 기업 성장의 발판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오는 2011년에는 매출 3000억원, 순이익 300억원을 올리고 2015년에는 매출 5000억원을 돌파, 중견기업 대열에 올라설 셈이다.
박승정기자 sjpark@etnews.co.kr
<남석우 부회장은>
1952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회사 설립 이후 국내 첫 모뎀 수출을 성사시켰고, 원격제어 전용회선 모뎀을 개발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다이얼업 모뎀을 개발해 미 FCC의 규격 승인을 받았으며 LAN, 음성영상회의시스템, 지능형 허브, 보안솔루션 사업 등에 나서 수완을 발휘했다. 1997년에는 회사를 당시 삼성전자 주식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증권거래소에 직상장,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지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정보산업연합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신뢰와 역지사지(易之思之)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가족은 1남 2녀. 아무리 생각해도 고마운 처와 증권사 애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큰 딸, 자신을 닮은 아들이 자랑거리다. 귀염둥이 작은 딸은 아직은 미완의 기대주다. 취미는 골프와 승마이며, 주량은 소주 1병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