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0. 10!’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 온 국민이 우리나라 남녀 신궁들에게 쏟았던 염원의 숫자를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56)은 인사동 초입의 그룹 회장 집무실에서 자신에게 불어넣는다.
10년째 국궁으로 익혀온 활 실력을 발휘해 회장실 한편에 마련해 놓은 인공 말 등에 앉아 벽쪽 과녁을 향해 쏘면서 다짐, 또 다짐한다. ‘10. 10. 10’은 2010년에 매출 10조원, 순이익 10억달러 달성이라는 ‘대성(大成)’의 비전을 담은 숫자다.
대성그룹은 지난 1947년 대구에서 연탄사업으로 출발한 대성산업공사를 모태로 한다. 김 회장의 선친인 고 김수근 회장이 그룹의 터를 닦고 기둥을 세웠다면, 아들인 김 회장이 기업으로서 ‘꽃’을 피운 셈이다.
김 회장은 경영 철학을 묻는 질문에 늘 ‘공익과 기업의 이익이 합치되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답한다. 아버지이자, 위대한 경영 선배였던 선친의 영향을 받은 소신이다.
국내 대부분의 기업이 휘청거리면서 기업가치가 폭락했던 IMF 관리체제 시절이다. 세계적인 헤지펀드 전문가인 조지 소로스가 고 김수근 회장을 찾았다. 소로스는 김 회장에게 모 은행과 증권사를 함께 인수하자고 제안했다. 소로스는 세계 자본시장의 저격수로 명성이 높았고, 기업 구도 재편을 꾀하는 기업에는 쉽사리 거절하기 힘든,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런데 고 김 회장은 국가나 기업이 무너질 때 유리한 조건으로 주식을 사고 국가와 기업이 회복되는 시점에서 되파는 소로스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 회장은 “많은 사람의 고통을 담보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익과 환경을 중요시하는 우리와는 어울리는 않는다”며 거절했다. 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배운 게 김영훈 회장이다.
◇경영 수업도 ‘마이웨이’=재벌 2세들은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아버지가 일군 회사에 들어와 경영수업을 받는 게 관례처럼 돼 있다. 김 회장은 달랐다. 미국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후 대성그룹으로 향하지 않았다. 시티뱅크에서 금융·자산 매니저로 사회에 뛰어든다. 시티뱅크 근무 경험은 최고경영자(CEO)로서 김 회장이 회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방향타 역할을 해냈다. 전체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은 결정 중 하나로도 남았다.
이후에는 목회자가 되려고 하버드에서 신학공부도 했다. 법학·경제학·신학 등 범위와 경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학문적 경험으로 인해 김 회장은 누구보다도 폭넓고 풍요로운 지식적 바탕을 갖추게 됐다.
김 회장은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사회를 보고,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가 폭넓은 학문적 경험에 나온 것으로 믿는다”며 “젊은 시절부터 회사 경영에 몰두했다면 얻지 못할 평생의 자산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선친의 간곡한 바람으로 1995년부터 회사에 합류했다.
◇에너지 기업의 미래를 준비한다=평생 에너지 사업을 해왔고, 기업을 일궜지만 여전히 김 회장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역시 에너지다. 미래 인류 문명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려 있는 부문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석유는 향후 40년, 천연가스는 60년 정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봅니다. 증기기관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됐을 뿐 아니라 전력의 보급을 거쳐 컴퓨터를 이용해 정보화 혁명까지 뒷받침해온 화석에너지가 고갈된다는 것은 현대 문명 전반의 지속 가능성에 중대한 위협이 됩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온실가스 배출 규제, 즉 화석연료 사용 제한을 위한 움직임입니다. 워낙 스케일이 큰 문제지만, 이 주제들은 공통적으로 화석연료의 사용 저감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화석연료를 대신해 현대 문명에 새 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대체에너지,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강력한 요구도 여기에서 나온다. 에너지의 미래는 얼마나 씀씀이를 줄이는지보다 대체에너지,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해 지금 화석연료의 자리를 얼마나 메우는지에 달려 있다는 게 김 회장의 지론이다. 대성이 지금까지의 주력이던 연탄·가스를 대신해 태양광·태양열·풍력·조력·지열·바이오매스 등 다양한 신재생에너지의 개발 및 상용화에 몰두하는 것도 미래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신재생에너지 사업 글로벌로 뛴다= 대성은 지난해 5월부터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일대 330만㎡(100만평) 용지에서 진행 중인 GEEP(Green Eco Energy Park) 프로젝트에 총력을 쏟는다. 해외에서 벌이는 첫 신재생 복합에너지사업이기 때문이다. 몽골 명예영사기도 한 김 회장이 마치 ‘자식’처럼 아끼고 가꾸는 사업이다. GEEP 프로젝트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태양광·풍력 복합 발전시스템, 펌핑 시스템, 기상측정 및 모니터링 시스템, 태양광 지지대 및 모듈, 모니터링 하우스 등 에너지와 IT가 총제적으로 집적화된 구조다. 여름철에는 펌핑시스템을, 겨울철에는 난방시스템을 가동한다.
녹화 사업 지역은 몽골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동서쪽 50㎞ 지점이다. 약 120m 아래 지하수가 있어 녹지조성이 가능하다. 대성은 몽골정부에서 울란바토르 일대 330만㎡를 60년간 무상 지원받았다.
“몽골 GEEP 프로젝트는 세계 각지에서 진행 중인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모델로서 각광받습니다. 세계 90여개국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민간 에너지기구인 세계에너지협의회(WEC:World Energy Council)는 GEEP 프로젝트를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 아·태지역 대표 에너지사업(플래그십 프로젝트)으로 선정하고 전 세계 사막화방지 표준 모델 후보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몽골뿐만 아니라 사막화가 심각히 진행되고 있는 중국과 중앙아시아지역, 그리로 식수문제가 심각한 아프리카지역으로도 사업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사업의 요람 대구에도 신재생 ‘바람’=그가 태어낫 곳이자 대성의 모태였던 대구광역시도 큰 선물을 받았다. 대성은 대구 방천리 위생매립장의 매립가스(LFG) 자원화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대구 LFG 자원화시설은 약 1년간의 건설을 통해 지난 2006년 10월 완공됐다. 지역난방공사를 통해 대구지역에 난방에너지를 공급해오고 있다.
기후변화변화에 관한 유엔 기본협약(UNFCCC)의 청정개발체제(CDM) 사업으로도 등록됐다. 향후 UN에서 탄소배출권을 인정받으면 연간 40만톤 규모의 탄소배출권를 팔 수 있을 전망이다. 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으로의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대구도시가스 부설 대성청정에너지연구소는 도시가스를 이용해 수소를 만들고, 이를 산소와 반응시켜 전기를 공급하는 가정용 연료전지도 개발 중이다.
“예전 같으면 코를 쥐고도 돌아다니지 못했던 쓰레기 매립장을 전기를 생산하는 공원녹지로 완전히 탈바꿈시켰습니다. 그것이 대성그룹이 추진해온 ‘공익에 복무하는 기업의 이익’의 좋은 본보기라고 자부합니다. 세계 각국이 성공모델로 주목하는만큼, 우리 기술의 신재생에너지사업을 세계로 수출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습니다”고 말했다.
◇문화콘텐츠 산업을 새 성장동력으로=김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문화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그가 신재생에너지사업과 함께 문화콘텐츠사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키우려는 노력과 맞물렸다. 전격적으로 인수한 포털사이트 코리아닷컴을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디지털 테마파크로 육성하기 위해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집중한다. 계열 창투사인 바이넥스트창업투자를 통한 영화 및 게임 등 콘텐츠 사업 투자도 확대한다.
김 회장은 지난 5월 출범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민간 자문기구인 콘텐츠코리아추진위원회의 위원장까지 맡았다. 콘텐츠 전문가들과 함께 지혜를 모아 우리나라 콘텐츠산업의 육성 전략을 짜고 있다. 그가 매일 쏘는 국궁의 과녁에 ‘콘텐츠’가 있다. 이진호기자 jholee@ 사진=윤성혁기자 shyoon@
◆김영훈 회장은
지난 1952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왕성한 학업욕으로 미국 미시간대에서 법학석사(MCL)·경영학석사(MBA)를 동시에 취득했다. 시티뱅크를 다니다 8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국제경제학을 수학했다.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신학석사(M. Div) 학위도 받았다. 지난 95년 선친의 요청으로 대성그룹 본부 기획조정실장 겸 부사장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대성산업 대표이사를 거쳐 2001년부터 대성그룹 회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력 계열사인 대구도시가스와 경북도시가스의 대표 회장직을 겸한다. 자신은 ‘복받은 사람’이 되기보다, ‘복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수년 전, 어깨가 아파 고생하던 중 어느 시중은행장의 권유로 시작한 국궁에 푹 빠졌다. 매년 육군사관학교의 궁도 대회를 지원한다. 대회 때마다 직접 시사를 한다. 역사와 대자연을 배경으로 사랑과 진실을 그린 ‘닥터 지바고’ ‘쿼바디스’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의 영화를 좋아한다. APEC 기업 자문 위원 및 과학기술정보 실무그룹(TIWG)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세계에너지협의회(WEC) 부회장을 겸한다. 2013년 WEC총회를 대구에 유치하는 게 그의 또 다른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