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을 우리 민족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지난 1983년 2월 8일. 이른바 ‘2·8 도쿄구상’이라 일컫는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의 선언이다. 도쿄 오쿠라호텔에 체류 중이던 이 회장은 장고 끝에 ‘반도체 신규 투자’를 이같이 결심하고, 바로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를 대내외에 알리도록 지시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 회사는 삼성이 아니다. 1974년 설립된 한국반도체다. 재미 과학자 강기동 박사가 세웠다. 하지만 한국반도체는 설립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자금난으로 문을 닫고 삼성이 이를 인수했다. 그러나 당시 삼성 내부에서는 한국반도체 인수에 부정적이었다. 대단위 투자가 수반되는 반면에 성공 보장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이건희 당시 삼성 이사가 사재를 털었다. 이로써 한국반도체는 ‘삼성반도체’란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64K D램의 개발=드디어 1983년 2월. 삼성반도체는 일대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이병철 회장의 ‘도쿄구상’이 나온 것이다. 이는 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의미한다.
석 달 뒤인 5월, 64K D램 기술개발팀이 꾸려졌다. 칩 디자인 기술을 제공하기로 한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서 기본 설계도면을 넘겨받아 개발작업에 착수했다.
6월 17일 마이크론과 정식으로 기술계약을 체결했다. 64K D램 3000개를 제공받아 조립작업에 들어갔다. 조립공정부터 개발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기술을 기반으로 가공 및 검사기술까지 개발하겠다는 게 삼성의 복안이었다.
개발팀은 조립 시험생산에 들어간 지 40일 만에 생산수율을 일본과 맞먹는 92%까지 끌어올렸다. 64K D램의 조립공정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개발팀은 곧바로 공정개발에 착수, 11월 7일 마침내 309가지에 이르는 반도체 생산공정 개발을 모두 완료했다. 미국과 일본이 거쳐야 했던 4K D램과 16K D램 개발과정을 뛰어 넘어 단번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비록 설계도면을 마이크론에서 들여와 시작하기는 했지만, 309가지에 이르는 공정기술과 검사조립기술은 단 6개월 만에 독자 개발했다. 64K D램 개발에 6년 이상 걸린 일본과 비교하면 놀라운 ‘사건’이다.
이로써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져 있던 한국 반도체 기술격차가 4년으로 좁혀졌다. 정부는 개발팀의 이승규 이사와 이상준 박사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삼성의 ‘그룹기술상’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개발, 또 개발=1992년 9월 25일은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이 ‘새 지평을 개척한 날’로 기록된다. 삼성전자는 이날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드디어 일본을 따라잡고 세계 최정상에 올라섰음을 공식 선언하는 자리였다.
삼성의 64M D램 개발은 곧바로 반도체 업계의 순위 변동으로 이어졌다. 미국 데이터퀘스트는 1993년 5월 “1992년 반도체 시장을 분석한 결과 D램 분야에서 삼성이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 업체로 올라섰다”고 공식 발표했다. 삼성의 매출액은 11억9200만달러, 세계 시장 점유율은 13.5%였다. 도시바의 11억2300만달러, 12.8%를 능가하는 실적이었다.
이후 D램 시장에서 삼성의 독주는 파죽지세였다. 1994년 8월 삼성은 또다시 ‘256M D램 개발’이라는 메가톤급 발표를 내놓는다. 경쟁사인 미국이나 일본 업체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잇따라 세계 최첨단 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이어 1996년에는 1G D램을 개발, 반도체의 세대교체를 이끌었다. 2001년에는 마침내 4G D램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2004년에는 60나노 플래시메모리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 같은 삼성전자의 최신 반도체 선개발 전략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4월 세계 최초로 50나노급 D램 양산에 들어간 데 이어, 7월에는 SATAII 128기가바이트(Gb) 멀티레벨셀(MLC)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의 양산에 돌입하는 등 최근들어 삼성전자는 신제품 개발보다는 생산비를 줄이는 ‘양산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흥 반도체공장의 탄생=이병철 회장은 도쿄구상을 발표하기 반 년 전인 1982년 7월부터 반도체공장 부지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 공장의 특성을 감안, △공업용수가 풍부할 것 △공기가 청정할 것 △소음이나 진동이 없을 것 △서울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여야 할 것 네 가지를 용지선정 기준으로 제시했다.
삼성은 여러 요건을 감안해 수원·신갈·기흥 등을 1차 후보지로 선정하고 타당성 조사에 나섰다. 조사 결과 지하수와 전력공급, 토지분양 등에서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좋은 평가를 받은 ‘기흥’이 공장부지로 선정됐다.
삼성은 64K D램 개발이 한창이던 1983년 9월 64K D램 생산라인 건설에 착수한다. 설계는 그룹 관계사인 코리아엔지니어링과 삼우종합설계을 비롯해 일본의 시미즈건설이 맡았다. 시공은 삼성종합건설과 중앙개발이 공동으로 담당했다. 최고 주안점은 양산 라인이 외부의 충격이나 진동에 영향받지 않도록 지반을 튼튼히 하고 용력 공급이 원활하도록 구조물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특히 클린룸 공사는 초정밀 공사 경험이 없던 당시 건설 담당자들에게 난제였다.
하지만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기공 6개월 만인 1984년 3월 말 기흥공장이 완공됐다. 준공식은 5월 17일 열렸다.
인터뷰/성평건 제이스텝 회장
“20여년 전 기흥은 잡초와 잡목만 무성한 야산이었어요. 지금의 기흥밸리는 상상도 못했죠. ‘상전벽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겁니다.”
1983년 8월 기흥공장의 초대 사업본부장을 맡은 성평건 현 제이스텝 회장(67)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삼성석유화학 공장장으로 있던 저를 부른 것은 이병철 회장입니다. 이 회장은 ‘6개월 내 공장 건설을 완료하라’고 지시했어요. 야산을 깎아 공장을 가동하는 데까지 6개월이라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공기단축은 시간과의 싸움인 반도체사업에 이제 막 뛰어든 삼성에게 절체절명의 과제였어요.”
성평건 본부장은 영하 15도의 추위 속에서도 24시간 공사를 강행했다. 휴일도 명절도 없었다. 불도저 316대와 쇼벨 126대, 덤프트럭 674대 등 총 투입장비 2000여대와 연인원 26만명이 쉴 틈없이 움직였다. 미국·일본의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 관례상 18개월 이상 걸리던 공사는 5개월 만에 일단 마무리됐다. 파견된 일본 기술진은 혀를 내둘렸다.
이 같은 기적의 요인을 성 공장장은 ‘정신적 공감대’에서 찾는다. “모든 공사 참여자에게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인식시켰습니다. 무모한 목표에 걸맞게 무모할 정도의 정신무장을 요구하는 벽보를 만들었어요. 그것을 사무실이며 식당, 임시 숙소 등에 붙이고 외우게 했습니다.”
성 본부장은 협력업체나 기기 납품업체에도 이 내용을 편지로 보냈다. 이들 업체의 대표를 점심시간에 초대해 이 같은 절박함을 수시로 설명, 협조를 구해낼 수 있었다.
1994년 삼성종합화학 상담역을 끝으로 퇴사한 성 회장은 현재 제이스텝 회장으로 육각수 등 건강제품 판매사업을 하고 있다.
류경동기자 nin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