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가을 `위기에 빠진 팹리스`](상)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상)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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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7년 IMF 직후 창업 붐을 이루며 꽃을 피운 팹리스 반도체 산업. 지난 10년간 무럭무럭 자라 전자산업의 한 축으로 자리 매김했다. 그러나 지금은 찬밥 신세다. 많은 기업이 무너지면서 주식시장에서는 소외주로, 벤처캐피털(VC) 회사들은 쳐다보지 않는 투자처가 됐다. 우리나라 팹리스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격변의 시대에 직면했다. ‘위기와 기회는 동시에 온다’는 말처럼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10년 후에는 분명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팹리스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아울러 어떻게 미래를 열 것인지 대안을 제시한다.

 

 팹리스 산업은 지난해부터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 여파로 올해 들어 구조조정이 활발히 일어났다. 반도체산업협회 시스템반도체지원팀이 매출액 상위 36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36.2%였던 팹리스 성장률은 지난해 -0.9%로 곤두박질쳤다. 순이익 역시 2% 수준에 불과하다. 올 초 코스닥에 상장한 넥실리온은 상장 첫 분기 매출감소와 적자라는 시련을 겪었다.

 이 같은 부진 속에 많은 CEO가 팹리스업계를 떠났다. 김광식 다윈텍 전 사장, 정세진 펜타마이크로 전 사장, 김태완 코아크로스 전 사장 등이 올해 회사를 그만뒀다.

 일부 회사는 업종전환을 모색한다. 엠씨에스로직은 나노테크닉스와 합병해 첨단 나노섬유 전문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다. 에이로직스는 에너지를 신규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새 성장동력을 찾는 노력이지만 팹리스로선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배어나온다.

 팹리스업체들이 잇따라 손을 들고 있는 것은 IT 경기 부진과 더불어 치열한 경쟁, 단가인하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고도 최신 공정에 들어가는 막대한 개발비를 감당하지 못해 위기를 겪는 팹리스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모바일 제품에 사용되는 65나노 공정은 칩 하나를 만드는 데 최소 10억원에서 많게는 100억원까지 든다. 대기업에 이 정도 금액은 속된 말로 ‘껌값’이다. 그러나 영세한 팹리스가 매출의 10%를 넘는 금액을 해마다 쏟아붓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2000년에 창업한 A사가 대표적이다. 8년간 많은 설계데이터(IP)와 노하우를 축적해놓고도 공정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자금을 제때 수혈받지 못해 기술이 사장될 위기에 직면했다.

 어렵사리 운영자금을 끌어들여 최신 공정을 적용하면서 매출을 발생시켜도 낮은 이익률이 발목을 잡는다. 재투자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민 엠텍비젼 사장은 “이익률을 확보하지 못하곤 재투자가 불가능하다”면서 “한국에서는 20% 이상의 이익이 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하고 있는 제품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팹리스의 전방산업인 시스템 구조가 급변하는 것도 업체가 속도경쟁에서 뒤처지게 만들고 있다.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사장은 “우리나라 팹리스가 많이 하는 품목은 휴대폰 멀티미디어, MP3, 디스플레이 구동칩”이라면서 “휴대폰은 경쟁이 심한데다 퀄컴이 하나의 칩으로 기능을 통합하면서 어려워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허 사장은 이어 “디스플레이는 기술발전으로 패널당 칩 개수가 줄어든데다 단가 하락이 심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규모가 영세하고 기술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회사는 앞으로 살아남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단의 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우리나라 팹리스산업의 붕괴는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용어설명

 팹리스(fabless) 반도체회사는 제조라인을 두지 않고 반도체 칩을 구현하는 하드웨어 소자의 설계 및 판매를 전문으로 한다. 팹리스 반도체가 설계한 칩은 수탁생산회사인 파운드리(foundry)에서 맡아 생산하게 된다.

  설성인기자 sise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