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초 기자는 가리봉역(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 벤처 타운에 입주한 고영테크놀러지를 찾은 바 있다. 인쇄회로기판(PCB)의 고질적인 납도포 불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3차원 솔더페이스트 검사장비를 한 벤처기업이 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세트 업체들은 ‘RoHS’ 지침에 대응하고자 무연(Pb-Free)기술을 조립 공정에 도입하기 위해 노력을 막 기울이던 때였다. 하지만 2차원 영상만으론 무연 도포 불량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따라서 SMT 조립 공정에서 납체적·납형상 등 납도포 상태를 입체 영상으로 구현, 납도포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고영테크놀러지의 3차원 솔더페이스트 검사장비는 세트 업체에 센세이션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사장(51)은 한 해 3차원 검사장비 70대 판매를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5년 6개월이 지난 10일 기자는 고영을 다시 찾았다. 외형은 10배 이상 커졌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고 사장은 ‘한 번에 한 가지 일만한다’고 한다. 유전인자 탓인지 모르겠지만 멀티플레이에 젬병이다. 대신 그는 집중력이 뛰어나다. 한 번 몰입하면 앞만 바라보고 간다. 금성사·LS산전·미래산업 그리고 고영테크놀러지에서 그의 집중력과 뚝심은 언제나 빛을 발했다. 고 사장은 사반세기를 로봇틱스에만 매달렸다.
◇북청 물장수 피가 흐른다=고 사장 선친은 함경북도 북청 출신이다. 선친은 교편을 잡았으나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가 남북 분단으로 실향민이 됐다. 생활 터전을 잃어버린 선친은 생계수단으로 서울에서 물 장수를 선택했다고 한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북청 물장수의 근면성과 과묵함을 고 사장은 어린 시절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고 사장은 초등학교 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고 한다. 2학년∼6학년을 야구선수로 활동했다. 군대식 훈련에 어린 학생들은 중도포기하곤 했다. 그는 달랐다. 오히려 즐겼다. 그는 4년 동안 3루수로 활동했다. 주장도 했다. 친구들과 몰려 다니면서 어른들 눈살을 찌푸리는 못된 짓도 많이 했다.
그는 교실보다는 운동장이 더 친근했다. 중학교 진학한 후 좀이 쑤셔 책상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불량끼 있는 청소년으로 비춰졌다. 중학교 1년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한다’는 그의 신념은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했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만 했던 그는 중학교에선 책을 잡았다. 대광중학교 2학년때 전교 1등을 했다고 한다. 공부벌레가 됐다. 180도 변했다. 서울고에서 서울대로 진학할때 고 사장은 핵물리학를 공부하고 싶었으나 선친의 거센 반대로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선 제어계측학을 전공했다. 그는 이후 단 한 번의 외도도 하지 않고 제어계측 분야에 지금까지 몸담고 있다.
◇로봇틱스 1세대로 나서다=1981부터 2년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그는 위탁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82년 말 ETRI 위탁연구원 시절 그는 신문을 읽다가 한 모집광고를 보고 몹시 흥분했다. 금성사 중앙연구소가 로봇틱스 분야 인력을 채용한다는 구인 광고를 본 것이다. “로봇틱스 분야가 한 눈에 끌렸습니다. 바로 입사 지원서를 냈습니다.”
금성사 중앙연구소 로봇팀 시절 고 사장은 공부하면서 R&D를 진행했다. 그는 “로봇틱스가 워낙 신학문인 탓에 이를 가르칠 교수도 국문 교과서도 국내 전무했다”며 “당시 로봇팀은 일본에서 원서를 구해다가 밤낮으로 이론을 공부하면서 로봇 개발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연구소 로봇팀이 우리나라 로봇 학문 1세대인 셈이다.
로봇팀의 ‘형설지공’은 팀이 출범한 지 5개월 만에 나왔다. 교육용으로 5관절 로봇를 국내에서 83년 처음 개발했다. 그 소식을 듣고 당시 전두환 정부는 중앙연구소 로봇팀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는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낸 끝에 청와대에서 로봇이 붓을 쥐고 먹물을 찍은 후 ‘선진한국’이란 붓글씨를 써내려가는 시연을 보였다”고 회상했다.
금성사는 산업용 로봇 사업도 진행키로 했다. 고 사장은 “교육용 로봇에서 산업용 로봇으로 영역을 확대하는 것은 한 마디로 ‘오만’ 그 자체였다”고 잘라 말했다. 교육용 로봇과 산업용 로봇 간의 기술 격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스테핑 모터·감속기·위치센서 등 로봇의 주요 부품을 일본에서 수입, 제작해야 했다. “일본 로봇 업체는 부품도 생산하는 데 반해 우리는 일본 로봇 업체에서 부품을 수입했습니다. 일본은 로봇산업을 60년대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20년 노하우를 단기간에 따라잡는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더 이상 참패는 없다=산업용 로봇 개발 실패는 고 사장에게 좌절감을 안겨줬다. 특히 그는 엔지니어로서 자존심이 심하게 구겨졌다. 산업용 로봇에서 일본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격차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수용하기 힘들었다. “‘죽기 전에 일본을 딛고 1등이 되겠다’고 마음 속으로 맹세를 수천 번 했습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85년말 해외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로봇틱스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로봇틱스 박사 과정을 4년 동안 밟았습니다. 금성사에서 3년 동안 겪은 현장 경험 덕분에 이론을 손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 사장은 피츠버그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89년 LG산전 산업기계연구소에 복귀했다. 고 사장은 4년 전 그가 아니었다. 실력이 출중한 로봇 전문가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해체한 로봇 조직을 재건했다. 그리고 먼지를 뒤집어 쓴 산업용 로봇을 다시 끄집어냈다. 산업용 로봇를 재설계했다. 제어시스템을 통합하는 등 설계 최적화 작업을 통해 1년 만에 로봇 외형을 5분의 1 크기로 줄였다. 일부 부품을 국산화,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속도도 개선했다. 수평형 스카라 로봇을 선보였다. 그 결과 일본 산업용 로봇과 경쟁을 벌일수 있게 됐다.
고 사장에게 또 하나 임무가 주어졌다. 회사가 SMT 장비인 마운터를 개발하기로 했다. 초기 산업용 로봇 개발 실패 경험은 귀중한 자산이었다. “산업용 로봇의 속도와 공작기계의 정밀도를 동시에 만족하는 관점에서 마운터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산업용 로봇 관점에서 마운터를 개발하면 실패확률이 높습니다.”
◇끝없는 도전은 계속된다=고 사장은 92년 마운터를 개발, 그 해 LG그룹 신제품 개발 경진대회 은상을 수상했다. 2∼3년 후 마운터를 시장에 출시했다. 97년 IMF 때 회사는 갑자기 국산 마운터 사업을 접었다. 그 대신 LG산전은 일본산 마운터를 수입하기로 한 것이다. 회사가 8년 동안 마운터 R&D에 투입한 기술 자산을 한 순간에 저 버린 사실에 그는 실망했다. 그래서 정문술 미래산업 전 회장을 찾았다.
미래산업에서 그는 2000년 초 ‘미래마운터’를 미국 시장에서 첫 발표했다.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속도는 고속 마운터와 비슷하면서 크기를 3분의 1로 줄였기 때문이다. 그 해 ‘미래 마운터’는 비전 어워드를 수상,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미래 마운터 출시 첫해 750억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세계 중속기 시장에서 1위 ,세계 전체 마운터 시장에서 4위를 기록했습니다.”
그 다음해 정 전 회장의 경영 퇴진과 장비산업 불황 등이 동시에 겹치면서 고 사장은 또 한번 선택을 하게 됐다. 미래산업 신임 사장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연구소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등 퇴사를 전격 결정한 것. 그는 2002년 고영테크놀러지를 설립, 고객를 대상으로 상품기획 조사를 신중히 벌였다. 고객들은 3차원 솔더 페이스트 검사장비를 요구했다. 그는 로봇·마운터 등의 개발 노하우를 기반으로 3차원 검사장비를 개발했다. 지금 이 제품은 세계 시장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솔더페이스트에 이어 최근 실장부품을 3차원으로 검사하는 장비를 개발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단 하나뿐인 혁명적인 제품을 내년에 선보일 것 입니다.”
이제까지 SMT 조립 공정에서 실장부품에 대한 3차원 검사는 거의 불가능했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그의 아름다운 도전을 또 다시 지켜 볼 수 있게 됐다.
◇고광일 사장은?
1957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1980년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에서 제어계측학을 전공했다. 1983년 금성사 중앙연구소에 입사한 이후 LG산전 산업기계연구소, 미래산업 연구소장(전무이사) 등을 지냈다. 금성사 중앙연구소를 1985년 퇴사한 후 4년 동안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로봇틱스 박사과정을 밟았다.
1992년 SMD 마운터를 개발, LG그룹 신제품 개발 경진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했으며 1995년엔 지능형 용업용 로봇시스템을 개발, 장영실상을 수상했다. 올해 글로벌SMT&패키징매거진에서 세계 기술 대상을 수상, 검사장비 부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위기는 곧 기회라고 생각한다.
안수민기자 sm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