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미국 샌디스크 인수 협상 테이블에서 일단 자리를 떴다. 삼성전자는 이윤우 부회장이 샌디스크의 엘리 하라리 CEO와 어윈 페더만 이사회 부의장에게 인수 제안 철회 서한을 보냈다고 22일 밝혔다. 그러나 제안을 철회한 것일 뿐 인수 계획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샌디스크 경영진을 압박, 협상테이블에 불러들임으로써 인수 협상을 조기 마무리짓기 위한 압박 전략으로 풀이됐다.
◇삼성, “주당 26달러 의미 없다”=삼성전자 측은 “최근의 금융위기 등 경제환경 악화와 샌디스크의 3분기 대규모 적자(영업손실 2억5000만달러), 실적 개선 전망 불투명, 도시바와의 합작 재협상, 인력구조조정 계획 등이 샌디스크의 기업가치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며 “이런 점에서 더 이상 주당 26달러로 인수를 추진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인수를 위해 처음 접촉한 시점인 5월 샌디스크 주가는 28∼33달러 선이었으나 3분기 경영 실적 악화로 21일 14.7달러로 급락했다.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한에서 “샌디스크의 거부로 협상에 진전이 없어 인수 제안을 철회한다”면서 “주주를 우선 고려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샌디스크 사업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는 점에 적절하게 대응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번에 철회한 것은 인수 제안서일 뿐 인수 계획 포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관계자는 “인수 계획을 포기한 게 아니라 주식 가치가 떨어졌으니 주당 26달러에 인수한다는 제안서를 철회한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인수 계획 포기 아닌 고도 협상 전략=통상 기업 간 M&A 협상은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 1년 이상 진행된다. 삼성전자가 5월 22일 샌디스크 경영진과 처음 만나 인수를 제안한 지 5개월 만에 인수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삼성 측에서는 샌디스크 합병에 따른 이득을 무시할 수 없다. 이윤우 부회장은 “양사 합병이 우월한 글로벌 브랜드, 강력한 기술 플랫폼, 규모와 리소스를 창출할 것”으로 확신했다.
삼성은 철회 선언을 통해 도시바와는 협상하면서 삼성과 접촉하지 않는 샌디스크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샌디스크가 도시바에 일본 설비의 30%를 넘기기로 한 지 하루 만에 나온 방침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 샌디스크 주주를 통해 경영진이 협상장에 나오도록 압력을 가하려는 시도로도 풀이됐다. 주당 26달러에 팔 수 있었는데 경영진의 일방적인 협상 거부 탓에 주식 매각 가치를 더 떨어뜨렸다는 분위기 조성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샌디스크 주주들은 충분한 가치를 제공받고 종업원과 다른 이해 당사자들 또한 다양한 기회를 통해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은 또한 정부의 해외 투자 자제 분위기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협상을 진행, 필요 이상의 외화 지출을 지양한다는 모습도 대외적으로 보일 수 있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샌디스크, “삼성 의도 의심” =업계의 관심사는 삼성의 인수 제안 철회를 계기로 샌디스크가 어떤 협상 모습을 보일지로 쏠렸다. 샌디스크는 일단 삼성전자의 진짜 의도에 의구심을 내비쳤다. 본지가 샌디스크의 홍보대행사(텍스트100)를 거쳐 공식 견해를 묻자 샌디스크는 “이사회는 초기부터 회사의 장기적 가치와 주주들의 권리를 고려해 교섭해왔지만 삼성전자가 (우리의 의견을) 무시해왔으며 전혀 접촉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샌디스크는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행동이) 삼성전자의 제안 뒤에 있는 진짜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고 밝혔다.
안수민·설성인기자 sm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