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없이 미래도 없다. 부존 자원도, 넓은 국토도 없는 우리나라는 우수한 인력이 창조해 내는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경제를 꾸려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장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기술 엔진이 어느새 식고 있다. 이공계 기피는 갈수록 심해졌다. 우수 인재는 금융·로펌·공무원 등 내수 지향적인 산업에만 몰린다. 기술 의존도는 어느 나라보다 크지만 기술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는 현저히 낮은 것이 현실이다.
전자신문이 한국산업기술재단과 공동으로 ‘기술이 국가 미래 바꾼다’ 연재를 기획한 것은 산업 기술을 보는 인식을 바꾸지 않고는 국가 체질의 업그레이드도, 국민소득 4만달러라는 목표도 어렵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기술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기술 문화의 확산과 산업 기술의 한 단계 높은 도약을 위한 다양한 문화적·교육적 대안들에 관해 의견을 모아 봤다.
<참석자>
강연흥 서울시교육청 장학관, 김경덕 LG사이언스홀 국장, 김용근 한국산업기술재단 이사장(가나다순)
사회: 신화수 전자신문 신성장산업부장(부국장)
◇사회(신화수 전자신문 신성장산업부장)=공대 졸업생들이 대거 의대나 법대로 옮겨가고, 중·고등학교 기술 교육 비중도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국가적으로 기술을 중시하는 풍토도 없어졌다. 기술인들의 자부심도 땅에 떨어졌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고 기술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이 절실하다.
◇김용근(한국산업기술재단 이사장)=기술인이 대접받으려면 이 분야에 좋은 사람이 많이 와서, 창의적인 제품을 내놓고, 그래서 돈도 벌고 성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중·고등학교에서 친이공계 마인드가 강화돼야 한다. 학생들이 이공계에 자기 미래를 걸 수 있도록 하는 게 과제다. 기술인들이 사회적으로 우대받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 문화가 필요하다. 국민이 기술에 쉽게 접촉하고 공감할 수 있는 체험·문화 공간이 필요하다.
◇강연흥(서울시교육청 장학관)=97년 IMF 지원 위기 때 기술로 사회에 기여하던 사람들이 먼저 정리됐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공계 기피 현상 심각하다. 고등학교 문과와 이과 비율이 지금 8 대 2까지 벌어졌다. 전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공대를 가곤 했는데, 지금은 공부 잘하는 애들은 이른바 ‘돈 잘 버는 의대’를 가려고 이과를 선택한다. 국가가 미래 산업을 계속 강조하면서도 정책은 없었다. 기업의 기술 의식 확산을 지원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 교육 통해 청소년기부터 기술이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식시켜야 되는데 이런 부분이 미흡했다.
◇김경덕(LG사이언스홀 국장)=기업 발전의 동력은 기술 인력이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 교육 특성화로 이공계 출신이 기업에 많이 진출해 산업 성장의 동력이 됐다. 그러나 IMF 이후 기업 측에선 고급 인력의 수급이 어려워졌다. LG도 외국에서 채용 설명회 하는 등 외국 연구개발 및 기술인력 선점 위해 많이 노력한다. 그만큼 국내에서 우수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 얘기다.
◇사회=기업 쪽에선 사람이 없어 해외로 구하러 다니고, 국내에선 청년 취업난이 심하다. 기술 인력의 수급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김경덕=에너지 분야만 해도 그렇다. LG도 태양광 사업 시작하면서 관련 기술 인력 확보에 나섰다. 정부도 에너지 기술 발달과 저변 확대 추진하고 있는데 정작 국내 기술 인력을 양성하지 않았다. LG도 해외 기업과의 합작 등으로 기술력 확보하는 단계다. 정부가 할 수 없는 분야에 기업이 미래 성장 분야로 진출하고자 할 때, 관련 전문 인력 없어 기업들이 힘들어한다.
◇사회=이과 학생이 이렇게 적은지 몰랐다.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 기술 교육이 중요할 텐데 고견을 말해달라.
◇김용근=기술 인력의 수요는 굉장히 다양해졌고, 고부가가치 사회로 갈수록 요구 수준도 높아지고 새로운 직업도 많이 생긴다. 그런데 학생들은 다 대학에 가서 다 비슷한 교육 받는다. 대부분 학생의 질이 거의 똑같다. 산업화 발전 단계로 보면 애매한 위치다. 고급화도 안 돼 있는데, 아주 낮은 단계도 아니다. 낮은 단계 인력도, 고급 인력도 해외에서 구해 쓰는 형편이다. 우리 산업 기술 인력의 수준이 높아져야 하는데, 국내 교육도 안 되고 사회적으로 투자도 못 한다. 빌 게이츠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강연흥=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82.3%다. 그런데 학력 인플레가 인적 자원의 질을 높여주는 것 같진 않다. 기술 교과서 봐도 학력 높이는 데만 주력했지 실제로 사회의 필요와 ‘매핑’이 제대로 안 돼 있다. 사회는 평균적 수재를 원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런 사람만 기른다. 각자 가진 특장점을 발견해 키우는 것이 수월성 교육이지 평균적으로 잘하는 것이 수월성 아니다.
◇사회=공대를 나왔다 해도 대학에서 배운 것이 기업 수요와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요새 좀 나아졌나.
◇김경덕=일반직은 공채하고 전문 기술직은 대부분 경력 위주로 채용한다. 새로 뽑아서 교육을 시키는 것보다는 기술 기반을 갖고 있는 인재들을 찾아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식으로 인재들을 수급한다. 공대 졸업했다고 해서 기업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강연흥=과거 경력직 채용 비율이 20%를 넘지 않았는데 지금은 70%다. 거꾸로 말하면 대학이 기업이 원하는 수준을 못 갖춘 것이다. 처음 취업할 때 중소기업에 가도 일할 만하면 대기업에서 뽑아간다. 중소기업은 이중고를 겪는다.
◇사회=교육 현장에서 기술 교육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고, 기술 교과서의 필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기술 교과서가 담아야 할 내용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강연흥=기술 교과서에 스토리를 담고 감성을 자극하면 기술에 재능 있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요새 학생들이 좋아하는 아이팟, 휴대폰, 게임 등 모든 것이 기술이다. 우리 실생활에 가장 밀접한 기술이다. 그런데 교과서는 이런 것과 거리가 멀다. 기술은 학생들한테 가장 천시된다. 수업은 형식적이고, 대학 입시 과목도 아니다. 기술은 과학보다 더 가까이 있고 체험할 수 있다. 눈을 뜨게 해주면 어려서부터 공학자가 되겠다, 기술자가 되겠다 꿈을 꾸게 할 수 있다. 교육 개혁,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고 좋은 교과서 쓰는 것이 첫 출발점이다.
◇김용근=기술 교과서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지금 교과서는 재미가 없다. 주입식이고, 단편 지식 위주다. 한국산업기술재단이 선생님 도와드리려 해도 교과서부터 안 돼 있다. 산업계 도움 받아서 유휴 실험 기자재도 학교에 지원하려 한다. 그런 것들을 중·고등학교와 연계해 기술 수업이 재밌고 생각하는 과정 되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서 필요한 건 생각하는 인재다. 이런 인재를 키우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정답이 없는’ 교육과 ‘융합’ 교육이다. 음악·미술·예술·철학 등이 융합돼야 창의가 나온다. 융합 내용을 중심으로 정해진 답을 제시하지 않는 교과서를 기획 중이다. 산업계 도움 받아 상공회의소 전경련 등 도움 요청해 기술 교육의 모멘텀 일으키려 한다.
◇사회=기술에 대한 인식 바꾸려면 기술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김 국장님은 사이언스홀 운영하시면서 이런 문제를 많이 고민하셨을 것으로 안다.
◇김경덕=우리나라에 등록된 과학관이 68개다. 과학관 1개당 인구 78만으로 선진국보다 많이 미흡하다. 학생들이 실제로 현장에 나가 체험을 통해 새 교육을 경험하고자 하는 요구가 많다. 정부는 2016년까지 과학관 226개 넘게 건립하겠다는 목표다. 광역시 중심으로 대규모 국립 과학관 세우고 지자체별 특성에 맞는 테마 과학관 건립을 지원해 1관당 23만명 수준으로 낮춘다는 목표다.
그런데 산업 기술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 건립 계획은 전혀 없다. 국민 자긍심 높이기 위해 지금 앞서가는, 세계적 기술들을 국민들이 공감하고 체험할 수 있는 산업기술박물관도 중요하다. 선진국들은 산업화를 일찍 시작해 오래 전부터 박물관 건립해 왔다. 운영 노하우도 우리보다 앞선다. 우리도 산업기술 박물관 생기면 중요한 역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연흥=과학은 그나마 꾸준히 노력해 엄청난 변화 있었다. 영재 교육에 관한 법률이나 과학 영재 양성 시스템 등 갖췄다. 초등학교마다 영재를 뽑고, 대학이 영재교육원을 운영하고, 과학고도 있다. 그런데 수출해서 돈 버는 기술을 왜 박대하는 걸까. 휴대폰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고, 우리나라 IT나 조선도 엄청나지 않나. 이런 저력에 국민들이 자부심 갖게 해야 하는데 정작 현실은 홍보도 안 되고, 학교에서도 천시한다.
◇사회=LG사이언스홀에 어린이들 많이 찾는다. 어떤 원칙으로 운영하나.
◇김경덕= 개관한 지 21년째다. 당시 과학관은 전국에 20개 미만이었고 교육과학관은 기초과학 중심이었다. 우리 같은 경우 LG 사업 분야와 접목할 수 있는 과학관을 지향했다. LG의 첨단 기술을 과학관 아이템과 접목,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하루 300∼500명이 찾고 서울·부산 두 곳에 각각 연간 10만명 방문한다. 전국 초등학교가 현장학습 체험 형태로 방문하고 방학 땐 부모들이 아이들 이끌고 관람한다. 개관 초기엔 중·고등학생 많았다. 최근엔 사교육이 많다 보니 중·고등학생의 바깥 활동이 거의 없다. 학교에서 안 시킨다. 아이들이 자기 미래를 설계해야 할 텐데, 공부에만 파묻혀 있다 보니 자기 잠재능력을 모른다. 기술에 관심이나 재능 있으면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뭐든지 잘하는 아이로 만들려다 보니 사회에서 필요한 인력과 멀어진다. 교육에 대한 인식이 안 고쳐진다면 이런 문제 안고 갈 수밖에 없다.
◇김용근=섬유, 자동차, 디젤 박물관처럼 산업 박물관은 지역 산업과 연계하는 것이 좋다. 지역이 축제만 할 것이 아니라 박물관 둬서 지식산업 육성해야 한다. 초기 투자는 들겠지만 역사로 남고 국가 재산이 된다. 스위스엔 미술관 옆에 산업관이 같이 있는 사례도 있다. 박물관의 융합이다.
세계 산업 박물관에 대해 공부하고 정부에 뜻도 전하고, 세미나도 하면 산업계도 호응할 것이다. 지자체도 관심 보인다. 엮으면 활발하게 될 가능성 충분하다. 지금부터라도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실 재미있게 자기 분야 열심히 하다 보면 창의력이 나온다. R&D 자금만 붓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김경덕=지자체, 기업과 협력해 전국에 산업기술박물관이 생겨야 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산업이 집중된 구미엔 디지털산업체험 박물관이 있어야 한다. 포항제철이 포스코역사관을 운영하는데 우리 제철 역사와 산업 기술의 결과들이 망라됐다. 거제도에 조선기술 공간이 만들어지면 좋지 않을까. 그런 부분들이 국가적 지원 통해 전국에 확산돼야 기술 문화 확산이 이뤄진다.
◇강연흥=도요타 박물관에 간 적 있는데 정말 부러웠다. 자동차의 모든 생산 과정을 거기서 다 보여준다. 자동차 기계 전자장치 산업 등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시각을 갖고 있다면 우리 산업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 커질 것이다.
◇사회=문제의 근원이 기술과 기술인을 우대하지 않는 풍토인 것 같다. 외국에선 한국의 TV와 휴대폰을 높이 평가하는데 국내에선 알아주지도 않고, 안타깝다.
◇김용근=과학계는 워낙 돈도 많고, 기초 쪽이라 정부 지원 필요성이 더 강했다. 반면에 산업계는 워낙 급성장한데다 우선 비즈니스를 해야 하니까, 사람 기르는것과 같은 장기 투자에 손을 못 댔다.
◇강연흥=정책 차원의 인식이 중요하다. 교과부에 기술이나 실업교육과 관련해 과거 60∼70명 하던 일을 지금 두 명이 한다. 기술 교육과 교과서를 전담하는 사람도 없다. 여러 과목의 하나일 뿐이다. 어려서부터 교육을 통해 꿈과 상상력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3H라 하지 않는가. 손(Hand)으로 직접 조작해야 머리(Head)가 발전하며, 가슴(Heart)으로 느끼고 이해한다. 독일에선 초등학교부터 목공 노작 실습을 수준 높게 한다. 나무의 감성을 느끼도록 연필도 페인팅 안 하고 쓰고 놀이기구도 원목으로 돼 있다. 이런 감성에 디자인 개념이 들어가면서 고급 기술로 발전한다. 꿈과 감성을 파는 상상력이 여기에서 나온다. ‘프라다폰’을 기능 보고 사는 것 아니지 않는가.
◇강연흥=기술 문화 확산이란 것이, 결국 부모가 애들 손잡고 가면서 체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김용근=조카가 독일에 산다. 방학 숙제가 목수 일하는 것인데 아주 재밌게 직접 하더라. 우리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디. 사회가 친환경 사회로 가는데, 친환경 사회란 곧 최고급 사회며 감성 사회다. 느낌으로 사는 것이다. 창의가 없으면 친환경 사회에서 팔리지 않는다. 예쁘고 좋고 아름답고 창의적인 제품만 팔리는 사회다.
◇강연흥=지금 학교에 노작 실습실 자체가 없는 학교가 많다. 예전보다 거꾸로 간다. 기술공업 수업 시간도 많이 줄었다. 공대에 가면 중소기업 가거나 장가도 가기 힘들어진다는 식의 그릇된 인식을 깨야 한다.
◇김용근=서울공대가 최근 미디어과를 신설하고 미대나 음대 교수를 채용했다. 공대생이 졸업하면 영화도 만들고, 반대로 예술인들도 공학 지식이 필요한 시대다. 금융에도 공학 지식이 중요해지지 않았는가. 공대가 튼튼해져 기술인이 경제·인문사회·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지적으로 지원해야 사회가 한 단계 성장하고 기술인에 대한 인식도 높아진다.
◇사회=기술의 가치를 알고, 어려서부터 교육과 체험을 통해 기술을 몸에 익혀 창의적 인재를 키우는 것이 산업화 이후 시대를 주도하기 위한 우리의 과제인 듯하다. 기술 문화 확산을 위해 좋은 말씀 전해 주신 참석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정리=한세희기자 h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