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두 번째 007 영화 ‘퀀텀 오브 솔라스(Quantum of Solace)’는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시적인 제목이다. 원작자 이언 플레밍의 단편 소설에서 차용한 이 제목은 007이 앞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제목을 사전적 의미와 의역을 더해 한국말로 굳이 풀이해보자면 ‘마음의 위로 한 조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역대 007시리즈가 수입국에서도 ‘살인면허’ 등 원제를 그대로 번역해 쓰는 전통을 따른 것을 감안하면 이번 작품의 제목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06년 ‘카지노로얄’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007시리즈 퀀텀 오브 솔라스는 모든 면에서 전편의 한 자락을 잡고 있는 속편이다. 아마 역대 007시리즈 중 처음인 듯 보일 정도로 전편과 주제와 내용이 맞닿아 있다. 물론 감독은 ‘몬스터볼(2001)’을 찍은 마크 포스터로 바뀌었지만 본드, 제임스 본드 역시 대니얼 크레이그가 그대로 맡았고 매혹적인 본드걸이 등장하는 것도 전편 그대로다. 퀀텀 오브 솔라스를 후속편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물 한 번째 이야기였던 ‘카지노로얄’이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원작 시리즈였던 것과 같이 이 영화도 플레밍의 단편에서 단초가 시작된다. 이는 ‘리빙 데이라이트(1987)’ 이후 007시리즈가 사실상 원작에서 멀어졌다는 비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원작을 만나게 된 팬들이 열광했음은 물론이다.
요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는 ‘배트맨 다크나이트’처럼 선배 영화를 유행인 듯 철저히 무시한다. 이런 무시에는 원작의 탄탄함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묻어있다. 퀀텀 오브 솔라스는 이전 스물 다섯 번의 007과 작별을 고하고 이언 플레밍이 생각했던 원작과 가장 유사하다고 불리는 카지노로얄의 마지막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카지노로얄이 마무리된 1시간 뒤. 제임스 본드는 첫 사랑 베스퍼(에바 그린)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휩싸인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본드와 M(주디 덴치)은 미스터 화이트(제스퍼 크리스펜슨)를 심문하는데 그 과정에서 베스퍼를 협박했던 조직이 예상보다 훨씬 위험한 집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밀리에 단서를 쫓던 본드는 MI6 내 누군가가 테러조직의 돈세탁을 위해 아이티은행에 계좌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곧장 아이티로 향한다. 그곳에서 본드는 아름답지만 성격이 까칠한 카밀(올가 쿠리젠코)을 만난다. 카밀 역시 본드처럼 사적 원한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본드를 냉혈한 사업가이자 추적 중인 비밀 조직 퀀텀의 배우 인물인 도니믹 그린(마티외 아말릭)에게 데려간다. 이후 본드와 그린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007시리즈는 카지노로얄을 기점으로 확실히 변했다. 마치 중국 문화혁명을 보는 듯한 변화가 이미 감지됐다. 그러나 ‘원전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퀀텀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카지노에서 보여줬던 007의 육체성은 퀀텀에서 말 그대로 ‘덩어리(퀀텀)’로 재확인된다. 사적 복수심에 휩싸인 본드는 잘 웃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 오직 베스퍼에 대한 복수심에 움직일 뿐이다. 이는 두세 명의 본드걸과 유희를 즐기던 선배들과 큰 차별점이다. 이런 점을 보지 못한 M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스파이는 은퇴할 때가 된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육체성과 퀀텀은 플레밍이 지면에서 생각했던 광활한 액션을 스크린에 풀어놓는다. 역대 최다인 2억2000만달러가 투입된 퀀텀에는 20만발의 공포탄이 쓰인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본드의 애마 애스턴 마틴 차량이 일곱 대의 명품 차량과 벌이는 액션도 마찬가지다. 마틴은 터널 앞에서 일곱 번이나 회전하며 새롭게 태어난 본드의 성장을 자축한다.
한정훈기자 existe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