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마음을 삭이고 또 삭인다. 그리고 그게 나중에 폭발한다.’
영화 ‘미인도’에서 주인공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으로 분한 배우 김민선의 신윤복 평이다.
오는 13일 개봉하는 ‘미인도(전윤수 감독, 김민선, 김영호 주연)’는 최근 문화계 아이콘으로 등장한 신윤복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속화를 즐겨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속설 등 단 두 줄의 기록’만을 남긴 채 사라져간 천재화가 신윤복(1758∼)을 250년 만에 스크린으로 불러들인다.
역사에 기록된 신윤복은 별 볼일 없다. 자는 입부고 첨사 신한평의 아들이라는 게 그에 대한 평가의 전부다. 하지만 수백년이 지난 지금, 신윤복은 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 말 최고의 화선으로 꼽힌다. 김홍도가 힘이 넘치는 남성적 화풍으로 소박한 서민의 삶을 살았다면 신윤복은 화려한 색감으로 여심이 담긴 풍류를 즐겼다. 그가 남긴 그림도 그렇다. 기녀들의 벗은 가슴과 둔부가 농염하게 그려진 ‘단오풍정’, 달 빛 아래 두 남녀가 안타까운 정을 나누고 있는 ‘월하정인’ 등. 신윤복의 그림은 조선시대를 살아간 조선인의 욕망을 박제 속에서 꺼내기 충분하다.
이런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인물인만큼 그가 여자였을 것이라는 속설도 존재한다. 영화 미인도는 이 점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만약 그가 여자였다면. 그래서 화석처럼 산화해간 천재였다면. 4대째 이어온 화원 가문의 막내딸이자 신묘한 그림 솜씨로 오빠 신윤복에게 남몰래 대신 그림을 그려주던 일곱 살 천재 소녀 윤정(김민선). 평범하던 그녀의 삶은 어느날 오빠의 자살로 송두리째 바뀐다. 오빠 대신 윤복으로 살며, 가문을 빛내야 하는 천형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김영호)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의 그림 실력을 가졌던 신윤복은 자유롭고 과감한 사랑을 그려 천재로 불리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윤복 앞에 강무(김남길)가 나타나고 윤복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스승인 김홍도가 윤복을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 사랑을 택하기 위해선 ‘화가’ 윤복은 포기해야 한다.
만약 영화 미인도가 재미있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긴 곤란하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미인도는 외피와 내피로 나눌 수 있다. 강한 흡입력을 가진 부문은 외피다.
외피는 신윤복의 모습과 이미지에 다름아니다. 영화 속 신윤복은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문근영과는 확연히 다르다. 색(色)에 사로잡힌 천재며 스승을 무너뜨릴 정도로 매력이 넘친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지만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미스터리 구조를 띠고 있다면 영화 ‘미인도’는 멜로에 중점을 둔다. 특히, 국민 톰보이 김민선은 국내 여동생을 누를 만큼 관능적이다. 물론 표현 수위도 국내 어떤 영화보다 높아 남성 관객을 만족시키기 충분하다. 전윤철 감독은 철저히 고증에 따르되 그림의 소재, 색감, 문양 등에는 현대적인 이미지를 담았다. 이렇게 탄생한 장면의 색은 단연 국내 최고다. 이 중 청나라 체위를 보여주는 기녀 설화의 색주가는 노력의 결정체다.
그렇지만 내피는 얇다 못해 춥다. 범을 고민하다 고양이를 그린 꼴이라고나 할까. 영화 미인도엔 화려한 외피를 받쳐줄 인간 신윤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으로 살아가며 여성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윤복의 고민은 미인도에 묻히고 강무와의 목숨을 건 사랑은 월야밀회(月夜密會)에 외면당한다. 심지어 영화는 제자를 사랑한 김홍도의 욕망도 아집으로 비치게 하는 신기를 발휘한다.
감독은 한국판 ‘색, 계’를 만들고자 했지만 계(戒)는 간 곳 없고 색(色)만 남았다.
한정훈기자 existe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