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디스플레이가 LCD 패널 가격 담합 혐의로 미국 법무부의 반독점법 위반 조사 결과 4억달러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2000년대 들어 단일 기업, 단일 품목으로는 최대 규모다.
세계 반도체·LCD 시장을 선도하는 우리나라 전자산업계를 향한 국제 카르텔 규제의 칼날이 더욱 날카로워질 것으로 보이는 신호탄이다. 일본·유럽연합(EU) 등지의 경쟁 당국도 잇따라 규제할 것으로 예상돼 국내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사태 추이=미국 법무부는 LG디스플레이에 4억달러, 일본 샤프에 1억2000만달러, 대만 CPT에 6500만달러의 과징금을 각각 부과하기로 합의했다. LG디스플레이는 내년부터 5개년간 분할 납부하기로 했지만, 회계상에 올 4분기부터 반영하기로 해 분기 경상이익 적자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LG디스플레이 측은 “이번 미국 반독점법 위반 조사 종결 합의가 향후 사업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 정도 경영과 투명 경영 활동을 강화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미국·일본·한국·EU 등의 경쟁 당국은 지난 2006년 전 세계 LCD 패널 업체들의 가격 담합 혐의를 포착, 과거 사례에 대한 국제 카르텔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 미국 법무부의 과징금 부과 합의 조치는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앞으로 다른 국가에서도 민·형사상 제재가 줄줄이 이어질 전망이다.
◇사안의 성격=LG디스플레이는 과징금 부과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지만 규제 전문가들이 보는 시각은 다르다.
송영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이 담합 행위에 가장 까다로운 법규정을 운용하지만 그 결과가 유럽·일본 등 타 국가의 바로미터(기준)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LG디스플레이에 대한 조치는 ‘플리 어그리먼트’다. 플리 어그리먼트란 혐의 당사자가 유죄를 인정하면 법원에서 법정 공방을 벌이지 않고 추정된 산업 피해액 범위 내에서 벌금을 내겠다고 합의하는 절차다. 이르면 이달 미국 법원이 최종 승인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통상 업체들이 법정 소송에 따른 엄청난 비용을 감안해 현실적인 대안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이 사안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과징금 규모다. 1990년대 말 미 법무부는 스위스 비타민업체인 ‘호프만라르시’사에 담합 혐의로 5억달러를 부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단일 기업과 품목으론 LG디스플레이에 부과한 게 사실상 최대 규모다. 국내 업체로는 지난해 대한항공이 3억달러의 과징금을 부과받았으며, 삼성전자도 지난 2005년 말 D램 가격 담합 혐의로 3억달러를 부과받았다.
◇끝이 아니라 시작=문제는 이번 과징금 부과가 디스플레이 산업 규제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이 세계 반도체·디스플레이 시장을 석권한 상황에서 각국의 정치·경제 논리가 맞물려 규제 ‘상승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EU 등의 경쟁 당국은 지난해부터 삼성SDI를 비롯, 전 세계 브라운관(CRT) 업체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카르텔 조사를 진행 중이다.
김대영 공정거래위원회 국제카르텔과 사무관은 “삼성·LG 등 대형 전자 업체가 거느린 제품군이 워낙 다양하고 세계 시장 점유율이 높아 규제 대상 품목이 줄줄이 이어질 수 있다”면서 “각국 경쟁 당국의 정책 기조를 보면 전자 업체들의 규제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다음은 삼성?=역시 이번 카르텔 혐의를 받는 삼성전자는 ‘자진신고’ 내지, 정식 법정 소송 두 가지의 가능성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진신고는 플리 어그리먼트와 달리 양측의 비밀 유지를 전제로, 손해 배상액을 일정 수준에서 합의하는 절차다. 담합 혐의를 부인하고 입증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미 법원의 정식 판결 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언제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현재 조사에 성실히 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식이든 삼성전자도 이번 카르텔 조사에서 예외일 수 없다.
LG디스플레이에 부과한 과징금은 ‘형법’상 조치일 뿐, 현재 민사 소송도 진행 중이다. 더욱이 내년부터 한국을 비롯, 일본·EU 등 각국 경쟁 당국의 제재 조치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내년도 시장 상황이 우려되는 가운데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는 이래저래 시련기를 맞게 됐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