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 와인 미라클

와인은 어렵다.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와인은 섬세한 인간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여러 가지 품종의 포도를 섞는 배율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도 하고, 똑같은 배율로 와인을 만들더라도 포도가 재배된 그 해의 햇빛과 강우량 등 날씨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최근 제작된 트렌드를 반영한 영화들에서는 예외없이 와인이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년)에서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가 뉴욕 시내를 전전하며 즐겨 마시는 와인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키안티에서 생산되는 듀칼레 리제르바이다. 와인 전문지 ‘스펙테이터’가 선정한 현재 뉴욕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이다.

와인에 관한 가장 인상 깊은 최초의 영화는 와인잔을 부딪치며 ‘그대 눈동자에 건배’를 외쳤던 ‘카사블랑카’(1942년)일 것이다. 그 와인은 코르동 루주 브뤼다. 하지만 모로코를 떠나야만 하는 잉그리드 버그만은 자신을 붙잡는 카페 주인 험브리 보가트에게 ‘뵈브 클리코라면 남겠어요’라는 명언을 던진다.



뵈브 클리코는 ‘카사블랑카’에서 반세기가 더 지나 만들어진 ‘섹스 앤더 시티’(2008년)에도 등장한다. 섹스 칼럼을 쓰는 사라 제시카 파커가 자신의 칼럼 광고가 버스에 실리자 친구들과 함께 버스정류장에서 축배를 드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그녀들이 마시는 와인이 뵈브 클리코다.

‘와인 미라클’(원제 Bottle Shock)은 총각파티를 떠나는 두 남자가 와인 생산지 산타바바라로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두 명의 여성과의 이야기를 그린 알렉산더 폐인 감독의 ‘사이드 웨이’(2004년)나, 피터 메일의 소설이 원작으로서 프로방스를 무대로 한 ‘어 굿 이어’(2006년) 등 지금까지 만들어진 와인 소재의 어떤 영화들보다도 와인 자체의 이야기에 가장 밀접히 접근해 있다.



허구적 구성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와인 미라클’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도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와인 미라클’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에 대한 예찬론에 가깝다. 이 영화는 와인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기억되는 ‘파리의 심판’을 다루고 있다.



‘파리의 심판’이란 1976년 파리 교외에서 있었던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당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이 쟁쟁한 프랑스 와인들을 물리치고 레드, 화이트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한 사건을 말한다. ‘와인 미라클’의 앞 부분은 서로 관련없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교차편집으로 전개된다. 한 남자는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와이너리를 갖고 있는 농장주 짐 바렛(빌 폴만 분)이다. 그는 대학을 가지 않고 농장일을 돌보고 있는 아들 보 바렛(크리스 핀 분)과, 어떤 와인도 한 모금만 맛을 보면 품종과 빈티지까지 정확하게 맞혀내는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 구스타보(프레디 로드리게스 분)와 함께 자신의 인생을 걸고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 한 남자는 영국인으로서 미국에 프랑스 와인학교를 설립하고 와인숍을 운영하는 스티븐 스퍼리에(알란 릭맨 분)다. 그는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함으로써 세상의 이목을 끌고 자신의 가게를 홍보하려고 계획한다.

짐과 스퍼리에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이 각자 진행되다가 이 두 사람이 만나면서 이야기는 흥미로워진다. 직접 캘리포니아 일대의 포도농장이 모여 있는 나파밸리를 방문한 스퍼리에는 나파밸리의 와인들을 마셔보면서 당혹해 한다. 프랑스 와인이 세계 최고라는 자신의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때문이다.



나파밸리 농장주들은 스퍼리에가 세계적 권위를 가진 와인 전문가를 초청해 파리 교외에서 실시하는 블라인드 테스트에 앞다퉈 자신의 와인을 출품한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짐은 스퍼리에와의 갈등으로 와인을 출품하지 않는데, 아들 보는 아버지 몰래 공항까지 따라가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한 와인 두 병을 건넨다.

‘와인 미라클’은 실제 있었던 흥미로운 와인 역사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와인 애호가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만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경직된 각본과 연출이 흥미를 반감시킨다. 인생을 바라보는 깊은 맛이 담긴 ‘사이드 웨이’의 풍치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름답게 펼쳐진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 실제 촬영된 그림 같은 장면들, 특히 구스타보와 샘이 섹스를 할 때 열린 문으로 바라보이는 포도밭 풍경은 너무나 황홀하다. 그리고 완벽하게 산소와 차단돼서 갈색을 띄게 되는 짐의 농장에서 생산된 샤도네이, 샤토 몬텔리나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충분히 시선을 사로잡을 만 하다.

화이트 와인이 아니라 브라운 와인이 되자 그것이 완벽한 꿈의 와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폐기처분 결정을 내리는 짐, 브라운 와인의 비밀을 밝혀내고 환호하는 보와 샘, 구스타보. 와인에 담겨 있는 맛의 비밀은, 찬란한 햇빛과 달콤한 바람에 있는 게 아니라 ‘포도농장에서의 최고의 비료는 주인의 발품’이라는 짐의 말처럼, 땀 흘리며 포도농장을 가꾸는 사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영화평론가·동서대 영상매스컴학부 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