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 美, 길어지는 `해고 그림자`

[글로벌리포트] 美, 길어지는 `해고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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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다. 미국 경기 침체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기업마다 감원 한파가 겨울 추위보다 매섭게 미국 사회에 몰아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치고 있는 경기 침체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에서 상황을 직접 체감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이번 경기 침체와 감원 한파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통계만 들여다봐도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미 노동부가 지난 7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월의 실업률이 6.1%에서 6.5%로 늘었다. 한 달간 일자리가 24만개나 줄었다. 지난 3개월간 없어진 일자리 수를 합하면 무려 65만개가 넘는다. 이 같은 수치는 14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2007년만 해도 실업률은 4%대 중반이었다. 불과 1년 만에 실업률이 2%나 더 올라간 것이다. 일자리 감소는 주로 제조업·건설업·금융업계에 일어났다고 한다. 결국 미국 사회에 무려 1000만명이 무직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규모 정리해고에 대한 미국 노동부 통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지난 9월 대규모 정리해고를 실시한 고용주는 2269건에 이른다. 지난 8월에 비해 497건이 더 늘어난 것이다. 또 이 수치 역시 2001년 9월 이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굳이 노동부 통계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대규모 정리해고 소식은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뉴스에서 날아들고 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6000명(전체 직원의 18%) 감원 소식부터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의 1800명(12%) 감원 계획 발표에 이르기까지 산업 뉴스에는 단골 메뉴처럼 정리해고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시카고 소재 재취업 알선 업체인 챌린저(Challenger, Gray & Christmas Inc.)에 따르면 올해 들어 10월 말까지 14만명이 넘는 기술 관련 직업이 사라졌다. 연말까지 예상되는 수치는 거의 ‘최악’에 가깝다. 이 회사는 기술직이 12월 말까지 총 18만명 이상 없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003년 22만8325건을 기록한 이래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10만7295건에 비해서는 거의 두 배에 육박한다. 닷컴 버블 붕괴 때인 2001년 69만5581건을 기록한 것에는 크게 못 미친다는 점에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까.

 요즘 기술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너희 회사는 괜찮냐”는 인사를 주로 한다. 결국 너희는 정리해고 없냐, 혹은 너는 괜찮냐 하는 질문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려줄까 한다. 내가 근무 중인 롬앤드하스 일렉트로닉머티리얼스(Rohm and Haas Electronic Materials)도 감원 한파에서 예외는 아니다. 롬앤드하스는 지난 여름 925명에 해당하는 인원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전체 직원 수가 1만6000명인 것을 고려하면 6% 선에 육박하는 인원이다. 내년 초 마무리될 다우케미컬(Dow Chemical)과의 합병 건과는 별개로 이루어진 조치라고 알려져 있다. 전자재료 부문은 특수 화학재료 부문과 더불어 회사에서 집중 육성하려는 분야라 감원 한파가 몰아칠 대상은 아니다. 한 동료는 자신이 일하는 동안 이 정도 규모의 정리해고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흉흉한 얘기가 돌 당시 내 출입카드(ID 카드)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았다. 그동안 정리해고에 대해 들은 얘기가 많아 속으로 ‘미국에서 이런 식으로 정리해버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짧게나마 했다. 다행히 단순 기기 오작동으로 밝혀져 담당자가 곧 문제를 해결해줬지만….

미국에서는 정리해고를 결정한 후 해당자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는 일이 왕왕 있다. 당일 e메일로 면담하자는 내용을 받고 매니저와 인사과 직원과 상담한 다음에 서류에 사인하고 짐을 정리해 나온다. 이때부터는 굳이 인사과 직원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경비원이나 매니저의 안내를 받으며 정문까지 가게 된다. 다른 것에는 손을 못 대게 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미국식 정리 해고 방식이 과장되게 알려져 있으나, 전혀 없는 이야기도 아니라서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의 정리해고는 한국의 정리해고와는 다르다. 미국 노동시장이 우리나라 기업별 노동시장과는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기업에서 해고당하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재취업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옮겨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쉽게 다른 기업으로 옮겨갈 수 있다. 정리해고로 직업을 잃었다고 해서 구직에 나설 때 결격 사유로 작용하지도 않는다.

 미국식 정리해고가 냉혹한 면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직이나 재취업이 많지 않은 것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미국에서는 일의 성격과 내용만 맞으면 옮겨갈 수 있는 업체 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많다. 큰 기업보다 대우가 더 좋은 중소 기업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또 작은 회사에서 일하다 큰 회사로 옮기는 것도 쉽다. 사회적인 시선도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인식이 좋지 못한 것과도 사뭇 다르다. 물론 이러한 노동의 유연성은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있기에 특정 시스템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규모 감원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경기가 좋아져야 할 것이다. 대규모 감원의 필요성이 근본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는 아무리 감원을 하더라도 핵심적인 기술이나 필수 역량을 가지고 있어서 정리할 수 없는 대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역시 쉽지 않으니, 모두들 마음 한구석에 크고 작은 부담감을 안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보스턴(미국)=이재형

롬앤드하스 연구원 (공학박사)

yijh00@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