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CEO] 박현남 성호전자 회장

[파워 CEO]  박현남 성호전자 회장

 가난·색맹 등 모든 악조건은 그에겐 되레 기회였다. 주어진 제약은 남보다 더한 노력으로 그를 이끌었으며 결국 이를 통해 극복했다. 콘덴서 전문기업 성호전자의 박현남 회장(55) 얘기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크든 작든 그 대가는 반드시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책상 머리에 앉아서 터득한 게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육신을 통해 얻은 믿음이다.

 그는 “부족한 점이 많다 보니 남들보다 배 이상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열심히 일하니까 노력의 결실이 따라다녔고 그는 그 결실에 깊이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이를 깨닫게 해준 사회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고 강조한다. 사원으로 첫 입사한 콘덴서기업 진영전자를 인수해 지금의 견실한 중견 부품기업 성호전자를 만들기까지 그의 성공시대엔 최악의 역경을 헤쳐나온 도전정신이 늘 자리를 잡고 있다.

 ◇어머니 매운 회초리가 자립심 키워=선친의 고향은 평양이다. 1951년 ‘1.4 후퇴’ 때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가면서 선친이 전남 강진에 정착했다. 피난민인 터라 전남 강진엔 기댈 곳 하나 없었다. 당시 선친은 돈벌이에 관심을 일절 끊은 채 ‘김삿갓’처럼 전국을 유랑했다. 어머니 혼자 5남 1녀를 어렵게 키웠다. 어머니가 가장이었다. 셋 째인 박 회장은 어머니에게 어느날 회초리로 종아리를 심하게 맞았다. 말썽을 부려서가 아니다. 단지 초등학교 친구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박 회장은 “당시 어머니가 ‘친구 집에서 점심을 얻어 먹으면 밥 한 끼라도 친구에게 갚아줘야 한다. 그런데 집 형편은 여력이 없으니 밥을 절대 얻어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 데 밥을 얻어 먹고 들어온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회초리를 힙겹게 들곤 하셨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어머니 심정을 헤아렸다. 그는 이후 친구집에서 놀다가도 밥 때가 되면 집으로 줄행랑을 치곤 했다. 어리지만 남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심의 씨앗이 이때 심어졌다. 강진군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상경했다. 가정 형편이 워낙 어려운 탓에 입 하나를 덜어주기 위해서다. 그만큼 그의 집안은 가난에 찌들었다.

 서울 생활 초기엔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노숙도 했다. 서울역 인근 무허가숙소에서 새우잠을 자며 돈을 벌기도 했다. 여름철엔 서울 미동초등학교 앞에서 냉차를 팔았다. 경찰의 불량식품 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끌려가 물건을 모두 빼앗긴 채 유치장 신세를 지곤했다. 그는 “부끄럽지 않다”며 “인생의 굴곡을 겪었기에 지금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전천후의 사나이’로 불려=서울 생활을 다행히 1년 만에 끝내고 병영중학교에 입학했다. 큰 형이 서울에 취직해 학비를 대주기로 한 덕분이다. 그는 “1년 동안 타지에서 고생을 해보니깐 학교 다니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중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했다. 전교에서 1∼2등을 차지했다. 박 회장은 은행원으로 취직할 요량으로 인문고 대신에 선린상고를 선택했다. 그런데 군 제대후 은행원 꿈을 포기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신체검사에서 색약으로 판명돼 당시 은행 업무 자격 요건에 걸렸다. 취업 진로를 수정했다. 콘덴서기업인 진영전자에 입사했다. 관세 환급 업무를 맡았다.

 그는 남보다 2시간 일찍 출근했다. 사무실과 공장을 청소했다. 박 회장 본래 업무가 아니지만 열심히 살자는 신념으로 7년 8개월 동안 진영전자에서 동료보다 이른 새벽을 먼저 맞이했다.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돈도 없다 보니 직장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방법 밖엔 없었다”며 “특히 개인 사업을 시작할 때 나의 성실성을 믿고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진영전자 시절 ‘전천후 사나이’로 불렸다. 1977년 12월이었다. 수출시 수입 금액의 30∼40%를 돌려주는 관세환급금을 받으려면 마산세관에 내려가 서류심사를 받아야 한다. 통상 보름 이상 걸리던 시절이다. 그런데 그는 단 이틀 만에 해결했다. “담당 공무원이 관세환급 심사 서류가 선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15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당시 회사는 자금이 급한 상황이었습니다. 해당 공무원이 퇴근한 후 뒤를 밟으면서 이야기를 할 기회만을 찾았습니다.”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결국 선술집까지 따라갔고 밖에서 3시간을 추위에 떨며 기다렸다. 스산한 겨울비 마저 내렸다. “선술집서 나오는 해당 공무원이 택시를 타자마자 무조건 앞을 가로 막아섰습니다. 무릎을 꿇고 관세환급 심사를 빨리 해달라고 통사정했습니다. 해당 공무원은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인근 다방으로 함께 갔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내일 아침에 마산세관을 방문하라고 하더라고요.”

 이러한 뚝심 덕분에 대졸 사원이 3∼4년 만에 승진하는 계장직을 그는 입사 3개월 만에 달았다. 어떤 조건서도 제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도 함께 각인됐다.

 ◇사원으로 입사한 기업의 대표로 귀환=진영전자가 기울어지고 경영진도 바뀌었다. 그는 퇴직 후 1986년 7월 청계천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콘덴서 등 부품 유통업을 시작했다. 첫째 아들 이름을 따 ‘성호전자’로 지었다. 사업 초기 3개월 동안 고전했다. 하지만 주변 도움으로 부품 유통사업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매월 5000만∼1억원 매출을 달성했다.

 “진영전자에서 영업부 과장을 맡으면서 수출·입은 물론이고 금융 업무까지 제가 혼자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당시 업무로 만났던 분들이 ‘박현남의 성실함’ 한 가지만을 철석같이 믿고 물심 양면으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3년 후 수십억원을 벌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진영전자 CEO로부터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박 회장의 성실성과 경영 능력을 믿고 진영전자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박 회장은 퇴사후 8년 만인 1993년 2월 진영전자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15년전 사원이 대표이사가 됐다.

 “진영전자는 4∼5년간 적자기업이었습니다. 매출도 5분의 1로 크게 줄었습니다. 취임후 3개월 동안 경비실에 군용 침대를 갖다 놓고 업무를 진행했습니다. 부서마다 경영 목표치를 주고 목표치의 60%를 넘으면 성과금을 무조건 지급했습니다. 노력에 대한 반대 급부를 직원에게 인지시켰습니다. 한 달후 모든 부서가 목표량을 달성하기 시작하더니 생산성이 과거 대비 4배 높아졌습니다.”

 ◇내 인생에서 위기는 기회를 의미=박 회장은 진영전자 성공 요인으로 직원들의 의식 개혁을 꼽았다. “콘덴서는 장치산업입니다. 설비 가동률을 높이면 원가 경쟁력이 생깁니다. 22시간 이상 설비를 가동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취임해보니 진영전자엔 ‘잔업’이란 개념이 아예 없더군요. 110명에 달하는 직원 중 상당수가 진영전자를 부업쯤으로 인식하고 대충 대충 다니고 있었습니다.”

 진영전자는 박 회장이 CEO로 취임한 지 1년 6개월 만에 흑자 전환했다. 10시간 이상 일하는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고 그렇지 않은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퇴출되면서 모든 직원들이 박 회장과 ‘경영 코드’를 함께 한 덕분이다.

 박 회장은 2000년 3월 진영전자와 성호전자를 합병했다. 그 후 설비 자체 제작에 많은 공을 기울였다. 일본 설비에 의존하면 콘덴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경쟁 기업도 많고 납품 단가 인하율이 극심한 콘덴서산업 환경에선 원가 경쟁력만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는 설비제작팀을 구성, 수입 설비 가격의 3분 1∼5분의 1 수준에서 설비를 국산화했다. 설비 국산화 덕분에 고장이 나면 즉시 고쳤고 예방 정비도 가능했다. 설비 투자도 적기에 진행했다. 이 덕분에 설비 가동률이 높아졌다. 대다수 경쟁 기업들은 설비 가동률이 떨어져 고객 주문량을 제때 맞추지 못할 때 성호전자는 신속하게 납품했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IMF 때 물량 축소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04년엔 무연(Free Pb)공정에서 생산한 콘덴서에 하자가 생겼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콘덴서를 교체해줬다. 무연공정 안정화에 노력해 불량을 막았다. 성호전자는 박스형 콘덴서 1위 기업이자 국내 유일 기업이다. 박 회장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태양광 인버터를 비롯한 신사업에 뛰어들었다.

 “시장 환경이 어려울때 빛을 발하면 우수한 기업입니다. 지금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특히 올해 악조건들을 기회로 삼아 세계 기업으로 성장하겠습니다.”

 

 박현남 회장은

 전남 목포에서 1953년 5남 1녀 중 셋 째로 태어났다. 유소년 시절을 전남 강진에서 보냈다. 강진군 병영초등학교와 병영중학교를 나왔다. 선린상고에 진학하면서 상경했다. 197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입대해선 단기 하사관에 지원했다. 1977년 9월에서야 제대했다. 제대하고도 쉬지 않았다. 그 다음달에 진영전자에 입사했다. 8년 정도 일하다 영업부 과장을 끝으로 퇴사해 성호전자라는 회사를 새로 차렸다. 특유의 성실성과 노력으로 몇달 지나지 않아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그 사이 진영전자는 경영난을 겪었다. 그의 진면목을 기억한 진영전자 경영진들의 부름을 받아 1993년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2000년 진영전자를 성호전자에 합병해 성호전자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최우수 중소기업인 대통령표창을 수상했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지 않다. 그의 말대로 외형적으로 내세울 게 없다. 하지만 매사에 정성을 다한 덕분에 그의 고된 인생 역정은 수려하다.

 안수민기자 sm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