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한 사연 뒤에 숨은 비열한 일상.’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일반인에겐 다소 버거운 감독이다.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이면과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심각한 균열, 즉 폭력에 대해 서슴없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난해하다 못해 어렵다. 과학기술에 내재된 폭력성을 표현한 ‘비디오드롬’이 그랬고 할리우드 진출작 ‘플라이’와 인간과 기계의 충돌을 표현한 ‘크래시’ 역시 쉬운 영화는 아니었다.
이렇듯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폭력으로 보여주는 데 재능이 깊은 크로넨버그는 최근 철학자의 길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지난 2005년 만든 ‘폭력의 역사’ 이후엔 더하다. 그간 즐겨 다뤄온 SF·공포 장르를 포기한 대신 지배적인 스토리 라인에 심층 구조를 엇갈리게 배치하는 등 보다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철학자의 모습 그대로를 화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크로넨버그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Eastern Promises, 비고 모텐슨·나오미 와츠·뱅상 카셀 주연)’는 철학자로서 그의 색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전작 ‘폭력의 역사’처럼 도저히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은 평온한 분위기에서 자행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잔인한 살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런던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안나(나오미 왓츠)는 14살 러시아 소녀가 아이를 낳고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아기의 연고를 찾아주기 위해 소녀가 남긴 일기장에 써 있는 곳을 찾아간 그녀는 그곳이 런던 최대의 범죄조직 ‘보리 V자콘’의 소굴임을 알게 된다. 아이의 비밀을 캐내고자 하지만 안나는 이를 막으려는 조직 때문에 위험에 빠진다. 그 순간 그녀는 운전사인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를 만나 도움을 받게 된다. 이후 이야기는 안나를 보호하는 니콜라이와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안나의 분투기로 바뀐다.
구원이라는 메시아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스턴 프라미스’가 공개되자 크로넨버그 추종자들은 ‘폭력 미학 2부작’이라는 별칭을 붙여 전작 ‘폭력의 역사’와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사실 여러 정황상 속편으로 인식하긴 충분하다. 두 편 모두 비고 모텐슨이 주연을 맡았고 살인이 개입된 가족 드라마라는 점도 연속성을 의심하게 한다. 특히, 두 영화 모두 등장인물이 겪는 불행한 삶의 근원이 가족 관계의 훼손에서 비롯된다는 특징도 이런 혐의를 강하게 한다.
그러나 공개된 영화를 볼 때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폭력에 대한 새로운 메시아적 선언’에 가깝다는 판단이다.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이야기가 상층 플롯을 지배하는 양면적 스토리는 변함없지만 이스턴 프라미스엔 이전의 크로넨버그 영화가 가지지 못한 외적 ‘정화 과정’이 있다. 과거 영화들이 한없이 거칠었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거칠지만 정교하고 부드러우며 세련됐다. 심지어 니콜라이가 공중 목욕탕에서 상대편의 눈을 칼로 가격하는 장면에서도 잔인하다기보단 차분한 힘이 느껴진다. 환갑을 훌쩍 넘긴 크로넨버그여서인지 몰라도 폭력을 서술하는 방식이 이전에 비해 많이 순화되고 세련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영화 제목이 ‘동방의 약속(직역)’이라는 다소 성서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도 정화된 크로넨버그를 연상시킨다. 과거 크로넨버그 영화가 폭력을 극대치까지 끌어올린 뒤 하강에 대한 판단은 관객에게 맡긴 전례에 비하면 이런 변화는 거의 경천동지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가 변한 걸까. 이스턴 프라미스의 마지막 장면은 이에 대한 답을 주기 충분하다. 보스를 제압하고 조직 내 1인자가 된 니콜라이. 그가 입은 아르마니 양복은 힘과 어두움에서 중심을 지킨다.
한정훈기자 existe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