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CEO] 이완근 신성홀딩스 회장

[파워CEO] 이완근 신성홀딩스 회장

 이완근 신성홀딩스 회장은 영락없는 선생님이다. 정직과 신뢰, 절제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다. 꿈이 교직이었기에 대학 전공도 교육학을 선택했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를 교직이 아닌 기업으로 이끌었다. 그에겐 아직도 교직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니지만 학교 재단 이사로 적을 두고 있다. 최근엔 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 기업이라는 인생항로에 들어서 오늘날 신성홀딩스를 일궈온 이 회장의 35년 경영인생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펼치고 있는 미래를 함께 해본다.

 ◇시골소년 상경기=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지만 전기도 안 들어오는 오지였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3학년 때 6·25가 터졌다. 전란 속에서 정규 공부는 꿈도 못 꿨다. 천막과 땅굴, 불 탄 학교를 전전하며 공부했다. 독지가의 후원이나 미군 부대의 원조 물자로 생활했다. 5, 6학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시흥에서 서울로 유학을 하게 된 건 순전히 부모님의 의지다. 어떻게든 자식 교육을 잘 시키려는 부모님의 열망 덕분이었다. 서울 대방동 성남중학교에 진학했다. 형제가 서울 올라와서 셋방을 얻어 학교 생활을 했다. 고인이 되신 할머니께서 밥을 해주셨다. 땔감이 없어 관악산까지 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어려운 때라 형제가 교대로 시흥 집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돕고 쌀을 짊어지고 와서 밥해 먹고 학교에 다녔다.

 ◇교직의 꿈을 접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건 2년 후였다. 사정이 어려워 돈을 직접 벌어 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회사에 입사하는 것보다는 교사를 원하는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성균관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생 때도 신문배달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녔지만 사정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일을 하며 학비를 지원받는 근로장학생도 했다. 교직에 마음을 굳힌 탓에 심훈의 상록수 같은 책을 많이 읽었다. 교직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했다. 월남전까지 참전하고 취업을 하려는데 교직은 경쟁률이 높아 쉽지 않았다. 대학 다니면서 가정교사를 하던 집에서 ‘학교보다는 취직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아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학교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그만뒀다. 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교직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교사로 가기 위한) 모든 것이 결정돼서 회사를 그만뒀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일주일을 남겨놓은 시점에 학교에서 ‘오지 말라’는 연락이 오더군요. 학교를 찾아갔더니, ‘서울 사람이 여주 시골학교에 오면 얼마 안 있어 떠날 것 같아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군요.”

 학교에 가지 못한 이 회장은 낙심하고 상당한 시간을 전전긍긍했다. 외판서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1970년 초에 에어컨 세일즈맨이 됐다. 한일 수교가 이뤄져 일본과 교류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1년간 에어컨 외판을 하다가 영업부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해 정식입사했다. 직장 생활 3년만에 나와 동업으로 서울 종로 2가에 조그만 가게를 얻어 사업을 시작했다.

 ◇신뢰와 신제품으로 극복한 시련= 1973년 당시는 요구르트가 국내에 들어와 성장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요구르트를 저장할 냉장고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아 각종 부품을 사다가 조립해서 공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테인리스 박스에 나무 프레임을 얹어 기계를 장착한 당시의 제품은 시제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초기제품이었다. 이 회장은 이때 제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동업한 친구는 다른 회사로 옮겨가고 1977년에 신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신성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요구르트와 식품 저장 냉장고, 제약회사의 냉동설비를 생산해 공급했다. 항온항습기 분야 기술자들과 제품을 개발해 열심히 공급해 회사가 많이 성장했다. 직원이 하나 둘 늘어나고 제품 분야도 냉장고에서 항온항습기, 제습기 등으로 확대됐다. 79년엔 공공기관으로 시장을 넓히기 위해 법인화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법인화하자마자 오일쇼크가 찾아왔다. 국내 경기가 형편없이 나빠졌고 일이 없으니 업계에선 덤핑이 판을 쳤다. 결국, 70여명 되던 직원을 절반으로 줄여야 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첫 번째 겪은 어려움이자 1차 고비였다. 이 회장은 당시 “참담한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부품을 사러 가도 공급을 해주지 않아 어려움이 가중됐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성이 살아남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은행에서 지원이나 융자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회장은 “어음을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았다”며 “아마 그때 어음을 발행했더라면 부도가 났을 것”이라고 밝혔다.

  위기를 극복하자 승승장구하며 1996년에는 상장까지 성공했다. 상장하게 되면 자금조달도 쉽고 할 줄 알았는데 IMF 외환위기가 덮쳐오면서 모든 거래가 중단돼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 반도체공장(FAB) 물류 자동화 분야였다. 국내에선 안 하고 외국 기업이 크게 재미보고 있던 품목이었다. 미국 PRI와 파트너십을 맺고 시작했다. 투자도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했다. 2003년부터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해 2004년에 국내 시장에서 인정을 받았다. 올해 FAB 분야의 매출이 1000억원에 이르러 외국업체와도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운과 안목의 조화= 이 회장에게 딱 맞는 사자성어가 있다. ‘운칠기삼’이다. 기술과 안목도 좋았지만 그때마다 새로 시작한 사업이 호황이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처음으로 은행 융자를 받아 일본 제습기 업체와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상공부의 국산화 계획 승인도 받았다. 당시에 승인을 받으면 그 품목은 수입을 못하게 됐다. 마침 그 무렵 우리나라 조선산업이 발돋움을 하던 시기였다. 배에는 제습기가 필수적인데 수입은 안 됐기 때문에 좋은 조건에 공급을 할 수 있었다. 현대조선을 비롯한 다양한 업체로부터 수주를 받아 성장 가도를 달렸다. 제약회사에서 들어오는 주문은 단위가 작았지만 조선에 쓰이는 것은 대당 1억원에 이르렀다. 당시 연 매출액이 8000만원에서 1억원 수준이었으니 3대 분량의 수주만 받아도 연매출의 3배를 훌쩍 넘어섰다. 제습기가 조선산업에 들어가는지도 몰랐다가 대박의 꿈을 이룬 것이다. 원효로의 20평 공장에서 문래동 50평대 공장으로 넓혀 이전했다. 빚도 꽤 있었는데 제습기 아이템으로 빚도 갚고 했다.

 1982년에는 신성에 또 한번의 변혁기가 찾아왔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발표했다. 항온항습기와 제습기, 공조기를 해온 신성에 클린룸 사업 제의가 날아들었다.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치밀한 공조 계산과 처리 능력을 갖춘 클린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쉽지 않았지만 기술을 입수해 배워가면서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바로 일본으로 가서 반도체 클린룸 관련 정보와 서적 등을 닥치는 대로 구입하고 배웠다. 기술제휴도 하고 삼성과 함께 공부했다. 삼성이 신성을 반도체 클린룸을 하는 업체로 지정했다. 1983년에 중소기업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연구소를 설립했다. 제습기 사업을 하던 시절과는 단위규모가 또 달랐다. 제습기는 대당 1억여원이었지만 반도체는 라인 하나가 200억원 이상이었다. 그나마 제습기 사업을 하면서 회사 체질이 단단해졌기에 클린룸 투자가 가능했다.

 1984년에 반월공단에 1500평 규모의 공장을 건설했다. 삼성에 이어 현대·LG가 반도체 사업을 하니 성장속도는 대단했다. 성장속도가 빠른 만큼 4년여마다 반복하는 반도체 사이클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다.

 1991년 이 회장은 한 가지 결심을 한다. “경기 부침으로 인한 굴곡을 없애기 위해서는 해외시장 진출밖에 없다고생각했습니다.” 해외 시장개척이 쉽지는 않았지만 최근 새롭게 사업에 뛰어든 태양전지 사업에서 연이어 대형 수주 계약을 발표하는 것도 일찍부터 해외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블루오션의 원조= 35년 동안 기업을 경영하면서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것은 ‘돈을 떼지 않는 것’이다. 제품을 공급하고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은 안 하겠다는 신념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술개발을 통해 품질 수준을 높이고 고객을 만족시켜야 했다. 고객사도 철저히 가렸다. 삼성·현대·LG 등 우량 기업과만 거래했다. 영업직원들에게도 줄곧 안전한 거래를 강조해왔다.

 이 회장은 “기업이 경쟁에 휘말리면 이익이 낮아지고 실적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익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이익을 내지 못하면 지속가능 기업이 불가능하기에 남이 못하는 기술, 남이 하지 않는 사업을 기획하려 노력했고 그곳에서 이익을 창출했다.

 최근 태양전지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다가 이제다 싶어 본격적으로 투자했다. 최근 태양전지 수출 계약이 잇따르고 있다. 독일·스페인·이탈리아·영국·프랑스·그리스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로 사업영역을 넓힌 이 회장의 신성의 목표는 과거 ‘잘 살자’에서 ‘지구를 살리자’는 거대한 비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완근 신성홀딩스 회장은: 1941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성남중·고등학교와 성균관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집안 어른의 권유로 교직에 꿈을 뒀으나 이루지 못하고 기업의 길로 접어든지 35년이다. 80년대 한국냉동공조기술협회 회장을 시작으로 경기이업종교류연합회 회장, 반도체협회 부회장(고문), 원석학원(성남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 한국냉동공조공업협회 회장을 거쳤고 우리기술투자 대표이사 회장과 한국태양전지연구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주문정기자 mjj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