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끝> 새로운 전자 50년을 위하여
# 산업 태동과 확장기, 구조 조정
“우리가 그거(라디오) 맹글면 안 되는기요?” 6·25 전쟁의 흔적이 막 가시기 시작한 1957년 구인회 락희화학 사장은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직원에게 물었다. “안 될 거야 없지요, 사장님. 우리 기술 수준이 낮아서….” “그렇다면 문제 없구만. 기술이 없으면 외국 가서 배워오고, 그래도 안 되면 외국 기술자 초빙하면 될 거 아니오. 우리가 하면 될 끼라. 그거 한번 검토해 봅시다.”
1958년 금성사(LG전자)는 그렇게 출범했고 1년 만인 1959년 11월 국산 라디오 ‘A501’이 나오면서 국내에도 ‘된장 냄새나는’ 전자 제품이 등장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삼성전자가 설립됐다. 삼성전자 모태인 삼성전자공업이 1969년 1월 출범했다. 물론 1958년 이전에도 미제·일제 진공관 라디오와 전축 등이 있었지만 모두 외산인데다 국산이라고 해봐야 가내 수공업 수준의 단순 조립생산이 전부였다. 그나마 국산 첫 라디오 ‘A501’이 나오면서 전자제품도 시장이 열렸으며 비로소 산업으로서 전자 분야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전자산업은 1960년대 전후반을 거치면서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정부의 강력한 수출 지향 정책이 큰 힘이었다. 외국인 투자 유치가 이뤄졌고 수출산업공단이 전국에 걸쳐 만들어졌다. 이어 1970년대에는 ‘국산화’ 열풍이 불었으며 국내 기업 투자 비중이 커졌다. 제조와 생산, 자체 기술 개발 경험을 축적하면서 고공 성장한 것이 이때쯤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대기업이 등장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반도체·VCR·가전 등에 대규모 투자가 잇따랐다. 1990년대는 전자산업 구조가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바뀌었다. 세계화 경영을 위해 해외 투자로 성장의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고공 비행’하던 전자산업은 1998년 외환위기로 사업 구조조정이 절박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수출을 통해 기반을 닦아 나가는 상황에서 생존 경쟁에 몰리면서 위기를 맞았다.
# 고도 성장, 체질 변화
그러나 비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고, 움츠렸던 전자산업이 1999년 다시 도약했다. 나락으로 떨어졌던 데서 서서히 시장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V자형’ 회복 곡선을 그리면서 새 천년을 맞았다. 원동력은 바로 정보기술(IT) 산업이었다. 당시 IT 발전 두 축은 디지털 제품(하드웨어) 수출과 초고속 통신망 보급이었다. IMF 외환 위기로 찬바람이 불던 산업계에 수출은 경제 활력의 견인차였다. 메모리 반도체·LCD·휴대폰이 주력 수출 상품으로 떠올랐다. ‘반짝 활황’도 잠시, 2000년 후반 IT ‘버블 붕괴’로 반도체 등이 침체에 빠지면서 전자산업은 다시 타격을 받았다.
2001년 수렁에 빠진 국내 전자산업을 구원한 구세주는 중국이었다. 중국 경제가 부상하면서 수출이 다시 살아났고 멈췄던 생산라인이 돌기 시작했다. 2005년 수출 비중은 전체에서 36%까지 치솟았으며 전자산업 위상도 미국·일본·중국 등에 이어 ‘세계 4강’에 안착했다. 전자산업 체질도 확 바뀌었다.
1960년대 전자산업은 단순 조립 수준이었다. 생산 능력을 키우는 일이 산업계의 절대 과제였다. 1970년대는 생산기술 노하우가 필요했다. 품목도 1960년대 라디오·진공관 위주에서 컬러TV·전자 교환기·수동 부품으로 늘어났다. 1980년대는 반도체가 부상하고 제품 설계·공정 기술 수요가 높아지면서 질적 고도화를 이뤘다. 1990년대로 진입하면서 소형·집적화 기술에 힘입어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첨단 기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메모리 반도체·PC·모니터와 같은 IT 제품으로 ‘세대 교체’가 이뤄졌다. 2000년 이후에는 컨버전스와 반도체 고집적 기술이 부상하면서 선도 기술 주도로 산업 인프라가 완전히 재편됐다. 휴대폰·디지털TV·플래시 메모리·D램처럼 생산 능력뿐만 아니라 투자와 같은 전략과 기술이 필요한 쪽으로 산업 경쟁력의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 또 다른 도약을 위해
전자산업은 지난 50년 동안 기복이 있었지만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성장했다. 스스로 잘한 점도 있지만 세계적으로 ‘전자 부흥기’라는 외부 환경 영향도 컸다. 다행히 몇 번의 고난기를 거치면서 체질이 강해졌다. 전자 강대국이라는 세부 비전도 나와 있다. 정부는 2005년 전자수출 1000억달러 돌파 당시 2015년 ‘세계 3위 디지털 전자 강대국’을 새로운 목표로 제시했다. 세계 시장 점유율을 7%대에서 14%로 올리고 생산 규모도 212조원에서 590억원으로 늘린다는 게 골자였다. 자연스럽게 수출도 3000억달러까지 치솟을 것으로 낙관했다.
이제는 실현 방안이다. 새로운 전자 50년을 위한 해법은 간단하다. 약점을 줄이면서 강점을 살리는 전략 외에는 방법이 없다. 먼저 양적, 질적인 산업 구조 개편이 뒤따라야 한다. 전자업체, 생산 능력, 제품 구조, 제품 가지 수 등을 크게 확대하거나 고도화해야 한다. 새로운 산업과 신기술을 결합해 확실한 시장과 기술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분야를 선점해 나가야 한다.
산업 구조의 대전환도 필요하다. 지난 50년간 전자산업이 높은 성과를 올린 데는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기업 조직, 선택과 집중을 통한 효율적 지원, 수출 확대 전략, 최초를 좋아하는 국민 정서, 초고속 인터넷 규제 완화와 설비 경쟁을 꼽을 수 있다. 반면에 원천 기술, 전자 부품·소재산업이 취약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게다가 소수 품목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외부 경제에 취약하다는 약점도 가지고 있다. 아직도 환율 변화, 세계 시장 수급 변동 등 외부 충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업 구조다.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은 “전자산업의 커다란 패러다임의 하나는 전자 기술과 다른 업종 기술의 결합”이라며 “앞으로 전자산업은 융합 기술 고도화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나경수 전자정보인클럽 부회장도 “전자가 일류 산업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핵심 부품 소재의 기술 확보가 필수적이며 이는 선진국 기업의 인수 합병과 전문 엔지니어 확보로 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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