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꽁꽁 언 소비심리, `연말 특수는 없다`

세계 최대의 소비 도시 미국 뉴욕. 연말 쇼핑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세일이 시작된 지난달 28일 뉴욕의 맨해튼 거리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쇼핑객과 관광객들로 넘쳐 났다.

유명 백화점에는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쇼핑객들로 장사진을 이뤘고, 맨해튼의 상징, 타임스 스퀘어는 연휴를 맞아 가족 단위로 나들이 온 관광객들이 기념 사진을 찍느라 발 디딜 틈 없었다. 하지만 이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예년의 블랙 프라이데이 모습과는 분명히 달랐다. 축제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지만 제조·유통 업계의 손꼽아 기다리던 특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제위기로 주머니가 그만큼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외화내빈’ 블랙 프라이데이=이튿날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날의 뉴욕 맨해튼의 풍경을 ‘속빈 강정’이라고 평가했다. 당일 주요 매장에서 팔려나간 상품들은 대다수가 중저가 생필품으로 최대 70%에 이르는 할인 판매를 겨냥해 그동안 미뤄온 구매를 집중했을 뿐이라는 분석이었다. 또 베르도프굿맨 등 고가의 명품 매장은 단지 아이 쇼핑만 하는 고객들뿐이어서 실제 구매로 이어지지 못했고, 북적댔던 맨해튼 인파 역시, 예년의 10% 수준에 그쳤다는 충격적인 보도였다.

이후 발표된 전문 기관들의 분석보고서도 같은 맥락을 보였다. 시장조사기관인 쇼퍼트랙은 주요 소매업체들의 대대적인 할인공세 덕분에 블랙 프라이데이 주말 기간(지난달 28∼30일) 동안의 매출이 전년 보다 3% 늘어난 106억달러 규모를 이뤘지만, 이는 최근 4년간 최저 성장률이라고 발표했다. 지난해 성장률이 8.3%임을 감안한다면 3분의 1 수준이다.

국제쇼핑센터위원회(ICSC)는 미국 내 37개 주요 소매업체들의 11월 매출을 조사한 결과,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업체들의 매출이 전월보다 평균 2.7%가 감소한 것으로 밝혔다. 메이시스·JC페니 등 유명 백화점은 두 자릿수의 감소율을 기록했고, 타겟·코스트코 등 할인점도 하락 대열에 가담했다. 극소수 매출이 늘어난 업체들도 공격적인 할인에 이익률은 최악의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우울한’ 크리스마스 특수 분위기=더 큰 문제는 블랙 프라이데이 이후 쇼핑객들의 발길이 급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주요 소매점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가시화됐고, 최대 대목인 성탄절까지 쇼핑객들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더 큰 폭의 할인 정책을 내놓아야 할 지경이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내 대표적 백화점 중인 하나인 메이시스 유니언 스퀘어는 멤버십 가입자들에게 추가 20% 할인, 현금 150달러 리베이트, 특별 사은품 등 각종 미끼 상품을 앞세웠지만 방문 고객이 줄어드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여성 의류 매장에 근무하는 캐서린은 “예년과 비교한다면 매장을 찾는 고객의 수가 25% 수준밖에 안 된다”면서 “진열된 상당수 제품이 성탄절이 끝나면 재고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메이시스는 본사 차원에서 수익성 감소의 원인이 되는 재고를 축소하는 방안을 마련해 입점 업체들과 논의 중이다. 이 회사의 대변인 짐 슬루제바스키는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에 맞춰 이미 한 차례 재고를 정리했고 성탄절 재고는 입점 업체들이 되가져가도록 할 계획”이라면서 “대신 우리는 직영 코너를 줄이는 등 재고가 내년 1월까지 넘어가지 않도록 나름의 대안을 찾아 실행 중”이라고 밝혔다.

캘리포니아주 이스트베이 지역의 상업 도시 콩코드의 대표적 쇼핑몰인 선밸리도 손님이 줄긴 마찬가지였다. 시어스·JC페니 등의 백화점은 창고 대방출 형태로 재고 소진에 나섰으나 줄어든 고객들에 발을 동동 굴렸다. 쇼핑몰에 입점한 개별 브랜드 숍들은 단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잡겠다며 밤 11시까지 영업 시간을 연장하는 등 강행군에 나섰다. 이 쇼핑몰에서 15년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한인 교포는 “개업 이래 가장 심한 불경기”라며 “직장을 잃는 사람도 늘어나면서 좀처럼 지갑을 열려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빛을 본 ‘불황 마케팅’=최악의 상황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성과를 거둔 마케팅들이 눈길을 끌었다. 대형 할인매장 중 유일하게 지난달 매출 성장세를 기록한 월마트는 삼성·LG 등에서 공급받은 LCD TV와 닌텐도 위(Wii) 등의 게임기를 대폭 할인해 선착순 판매를 실시하면서 손님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베스트바이는 주요 전자업체들과 별도의 연말 할인 판매용 중저가 모델을 제작해 블랙 프라이데이에 앞서 특별 판매 행사를 벌이면서 짭짤한 재미를 봤다. 베스트바이는 대형 평판TV뿐만 아니라 프린터복합기, 마우스, 웹캠 등 컴퓨터 액세서리까지 미끼 상품을 제작해 투입했으며 멤버십 가입자들에게는 18개월 할부 판매도 실시했다. 짠돌이 쇼핑 고객에 덤까지 준 셈이다.

1+1(Buy one Get one Free : 한 개를 구입하면 한 개를 덤으로 주는) 판매’로 인기를 모은 업체들도 있다. 의류 브랜드 갭(GAP)은 상의 한 벌을 구입할 경우, 같은 디자인의 다른 색상이나 같은 가격대의 다른 상의를 끼워주는 형태로 고객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모으기도 했다. 이에 제이질(J·Jill) 등 경쟁 의류 브랜드들은 갭의 ‘1+1 판매’를 즉각 카피했으나 실제 판매 가격은 할인 전 가격을 제시, 소비자들로부터 눈속임이라는 빈축을 사기도했다.

미국소매업연합회(NRF)는 이번 성탄절 연휴의 소비 규모가 최근 6년 이래 최저 증가율인 2.2%에 그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소니·시티뱅크 등 주요 기업의 잇따른 감원 발표와 경제성장률·산업생산지수 등 경제 지표가 악화됐다는 소식은 소비심리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언제 실직자가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일까. ‘해피 홀리데이’ 하며 웃으며 주고받는 미국인의 인사말이 여느 때보다 맥없이 들린다.

뉴욕·샌프란시스코(미국)=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